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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와 이 세계


주한일본대사관 특명전권대사

시게이에 도시노리(重家俊範)


넬슨 만델라와 이 세계


최근에 타임지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대통령의 90세 생일을 맞아 꾸민 특집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2003년부터 2년 남짓 남아공에 근무하던 때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이 타임 지(7월 9일호)는 ‘만델라 : 리더십에 관한 8가지 교훈'이라는 제목 아래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뛰어넘어 나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

‘앞에서 이끌어라. 하지만 자신의 기반은 잊지 마라', ‘뒤에서 지도하라, 그리고 그가 앞에 있다고 믿게 하라', ‘적을 알라, 그리고 적이 좋아하는 스포츠를 알라',

‘친구를 가까이, 그리고 경쟁자는 더 가까이', ‘외모는 중요하다. 그리고 미소를 잃지 말라', ‘만사에 흑백 논리는 없다', ‘물러나는 것도 또한 지도력' 이라고 사뭇 경쾌한

필치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치범으로 종신형의 몸이었던 만델라는 1985년 백인 정부와 접촉합니다. 많은 동지들이 이를 전향(selling out)한 것으로 여겼으나, 그것은

그의 대원칙인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인종차별정책)의 종식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하나의 ‘전술'의 시작이었습니다. 큰 ‘원칙'을 위해 ‘큰 위험 부담'을 택한 것입니다.


1990년, 남아공은 만델라와 백인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인 데 클레르크의 탁월한 영도력 아래 피 흘리지 않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종식시킵니다.

또한 남아공은 그 때까지 보유하고 있던 핵무기를 폐기하고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조치 하에 비핵화를 실시합니다.

그 후 남아공은 1994년에 첫 민주 선거를 실시, 만델라가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화해의 정치'를 추진합니다.

오늘날 남아공은 몇 가지 큰 문제를 안고 있긴 하지만 대단히 훌륭하고 역동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만델라는 남아공 동남부의 움타타 근교 쿠누에서 1918년 7월 18일에 태어났습니다. 나도 쿠누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가까이에서 일본이 실시 중이던 물 공급정비 무상원조사업의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일대는 서 있는 나무라곤 거의 없는 초원의 구릉이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지평선까지 펼쳐진 웅대한 자연입니다. 아침이면 아이들이 줄 지어 학교를 향해 초원을 걸어가던 광경이 지금도 뇌리에 되살아납니다.

이 지역은 코사족의 땅으로 불리는데, 이 부족은 만델라와 타보 음베키 현(現)대통령 등 그간 많은 남아공의 지도자를 배출해왔습니다.


1960년의 샤프빌 학살사건(흑인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 69명 사망) 후,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인 아프리카국민회의(ANC)는 불법조직이 되고 맙니다.

이때부터 만델라는 이 단체 안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1961년 일단 구속되지만 이듬해 국외로 피신, 그 후 귀국을 계기로 체포되어

1964년 국가반역죄로 종신형에 처해집니다. 그리고 케이프타운 앞바다의 12km상에 떠 있는 로벤섬 교도소에 수감됩니다.

이후 그는 무려 27년의 인생을 감옥에서, 그 중 18년을 이곳 감옥에서 보냅니다.

그 동안 만델라는 수인번호 ‘46664'(four double six six four)로 불립니다.

몇 년 전 남아공에서 이 숫자를 딴 세계 에이즈 퇴치 콘서트가 대대적으로 개최됐던 것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케이프타운의 서쪽 앞바다에 로벤섬이 보이지만, 주변에 빠르고 차가운 해류가 흐르고 있어 쾌속선으로 가도 30분쯤 걸립니다.

파도가 험해서 제법 거친 뱃길이 되는 적이 종종 있습니다. 이 섬은 네덜란드 식민지시대부터 섬 전체가 교도소로 쓰였습니다. 만델라가 갇혔던 최고 감시동의 작은 방은

사방 3m의 콘크리트 바닥으로, 침대 없이 용변용의 뚜껑 달린 알루미늄 양동이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쇠창살을 친 조그만 창이 위쪽에 있고, 그 곳으로 작은 하늘이

보였습니다. 이 창살을 잡고 바깥을 내다보는 만델라와 빌 클린턴의 사진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그리고 정치범 출신의 안내자들이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생생한 설명과

아울러 이곳을 안내해줍니다. 철문을 닫으면 ‘철-컹' 하는 크고 차가운 소리가 교도소 전체에 울립니다. 수인들이 날마다 앉아서 돌을 깨던 안마당으로 나가자 태양이

사정없이 내리쬐어 눈이 아파옵니다. 로벤섬은 언제 가도 강렬한 자극을 받게 되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만난 로벤섬 박물관장 아메드 카트라 씨는 만델라와 함께 1964년에

재판을 받았던 동지입니다. 그 후임인 폴 랑가 씨도 로벤섬 교도소에 수감됐던 한 사람입니다.

박물관은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자료수집, 디지털화 등의 보존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일본도 그 사업을 지원했습니다.


만델라는 백인 정부와 치열한 협상을 벌입니다. 그 결과, 1990년 2월 만델라는 케이프타운 동쪽 팔 시 근교의 빅터 버스터 교도소

(만델라는 수감생활의 마지막 2년을 이 안의 특별가옥에서 지냈다)에서 자유의 몸이 되어 곧장 케이프타운으로 향합니다.

시청 앞 그랜드 퍼레이드 광장에서 열광하는 군중에게 연설을 합니다. 백인에 대한 증오를 부채질하는 것이 아니라,

만델라는 민주적인 신생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만들기 위해 마지막 노력을 할 것을 흑인에게, 백인에게 호소합니다


7월 19일자 미디어는 쿠누 자택에서 있은 생일 파티에 관해 보도했는데, 참석자 중에는 반투 홀로미사와 같은 낯익은 이름도 있었습니다.


1994년에 만델라는 <The Long Walk to Freedom(자유로의 먼 길)>이라는 자서전을 펴냅니다. 깊은 감동을 주는 책입니다.

격렬한 투쟁, 원칙에 대한 신념, 원칙 실현을 위한 유연성, 화해를 위한 용기 등 오늘날 세계의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 크게 고려해야 할 중요 사항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만델라는 지금도 남아공의 정신적 지주이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평화리에 종식시킬 수 있었던 것도 만델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시에 또 한 축의 당사자였던 데 클레르크 대통령의 위대함도 기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주 : 위에 실린 로벤섬 사진은 Museums Online South Africa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2008.8.5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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