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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다카하시 다에코(髙橋妙子)


8월말 서울에 부임해 한 달여. 참으로 눈이 핑핑 도는 한 달이었습니다. 당 공보문화원에서 열린‘한일교류말하기대회’시상식에 참석하고 COEX에서 열린‘일본유학박람회’를 시찰하는 등 수많은 분들과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언론 관계자도 많이 만났습니다. 지난 한 달 사이 무려 300명 가까운 분들과 명함을 교환했는데, 동료의 말을 빌면 아직도 인사차 찾아뵐 분들이 많다고 하는군요. 덕택에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은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달여의 서울생활에서 가장 참신한 것은‘지하철 통근’입니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 이동이 참 신선합니다. 도쿄(東京)에 있을 때도 물론 지하철로 출퇴근을 했지만, 해외근무에서는 처음입니다. 특히 전임지였던 마닐라에서는 3년간 개인 기사가 있었습니다. 주말이나 심야나 언제 어디를 가든 역대 정치부장을 모셨다는 필리핀인 기사가 운전을 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단 100m도 길 위를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유별난 게 아니라, 제 주변에서는 그것이‘표준’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서울은 어떤지요. 개인 기사는 상당한 부자들이나 둡니다. 그래도 대중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거나, 있더라도 밤중에 여자 혼자 다니기 위험하다면 자가운전을 하든가 어떤 수단을 강구해야겠지요. 그러나 서울은 지하철과 버스노선이 잘 정비되어 있고, 밤중에 여자 혼자 택시를 이용해도 위험하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마닐라 생활을 통해 완벽한 장롱면허 소지자가 된 내가 운전대를 잡는 쪽이 오히려 위태롭지 않을까요. 그리고 실제로 지하철이나 버스로 이동하는 것이 꽤나 즐겁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주위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옵니다. 추석 연휴 동안, 치마저고리를 입은 꼬마가 부모와 나란히 지하철을 타고 있는 광경이 퍽 정겨웠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는 자동차의 차창을 통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풍경들이 많습니다. 또 한글 표지판을 보면서 머뭇머뭇 지하철을 갈아타노라면, 오래 전 외국을 처음 여행할 때도 꼭 이랬다는 생각에 그리움이 솟구칩니다. 더듬거리는 한국어로 택시를 타고 목적지에 당도하면 왠지 작은 모험을 한 것만 같아 마음 흐뭇합니다. 1998년 2월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10년 후의 이런 내 모습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시 세계는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한국을 주목했습니다. 동시에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경제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유럽에서 근무 중이던 나는 여러모로 화제였던 한국을 두 눈으로 보고 싶어 휴가차 귀국한 김에 한국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하여 서울에 도착하는 길로 대사관에 근무하던 동기를 찾았습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하는 다케시타(竹下) 전총리의 영접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한국 사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고, 특히 판문점 관광을 꼭 하라고 권했습니다. 나 또한 판문점 관광이 그 당시 한국이 처한 정치적 경제적 현실을 십이분 투영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한국인 가이드가 판문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그 날의 관광 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서울에서 열릴 대통령 취임식을 목전에 두고 북한이 어떤 도발행위를 할지 몰라 현지의 경계 수준이 평소보다 높아졌다는 말을 했습니다. 또 실제로 자유의 집에 도착해 판문점의 역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같은 것을 보고 대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후 막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장으로 이동하려는데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북한 측 비무장지대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오늘 관광은 여기서 중지하고 이대로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남북분단의 현실을 눈앞에 들이대는 듯싶은 긴장 어린 순간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기억에 뚜렷한 것은 경제부활에 거는 뜨거운 소망을 토로하던 가이드의 모습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한국경제는 97년 후반 외환위기를 맞았습니다. 상황이 가장 어려웠던 97년 12월 한국의 대외채무 총액이 1550억 달러(이 중 단기외채가 230억 달러)인 데 비해 외환보유고는 38억 달러에 불과했던 데서 문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엔화(円貨)에 대한 원화의 환율도 지금은 100엔에 750~800원 수준이지만 당시는 1300원 안팎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해 말에는 IMF(국제통화기금)의 210억 달러에 이르는 긴급구제금융과 일본의 12억 8천만 달러의 브리지론 제공 등에 의해 일련의 경제지표는 다소 개선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하지만 한국의 경제회복의 길은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런 실정임에도 한국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모으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면서 “반드시 조기에 경제회복을 이룰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관광 가이드의 모습에‘한국은 굉장한 나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지금 안전보장면에서는 한반도의 비핵화문제를 다루는 6자회담이 진행 중이며 7년 만에 남북정상회담도 열렸습니다. 그리고 경제면에서는 불과 몇 년 만에 외환위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연 5%의 경제성장률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十年一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하철을 갈아탈 때마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되새기곤 합니다.


주 :‘十年一昔(주넨 히토무카시)’는 일본 속담으로, 10년을 한 단위로 보고 그 사이에 사회가 엄청나게 변함을 뜻한다.


번역 : 김경희 번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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