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인 재회
2018년 8월 31일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니시오카 타쓰시
나는 어릴 적부터 외국에 나가는 것을 동경해 왔는데, 대학에 입학한 후 그 기회가 생겼다. 한국과 학생교류를 하고 있던 선배의 권유로 단기학생교류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처음 밟아보는 외국 땅. 유유히 흐르는 한강에서 대륙을 느꼈고, 공항에 서있는 병사에게서 긴장감을 느꼈다. 1988년의 일이었다.
한국의 대학생 그룹과 연일 계속 된 토론회에서는, 일한의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전후 세대인 우리 대학생들이 식민지 시대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가’에 대해, 그리고 일한의 장래 문제와 관련해서는, ‘유럽공동체를 참고해 일한 양국도 경제공동체 형성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등에 대해 토론했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내는 한국 대학생 그룹의 토론 실력에 우리 일본 측 학생 그룹은 압도당했다.
그 한국 측 학생 그룹의 리더 격 학생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다. 대학가 신촌에 자리잡은 한국의 전통가옥으로 낮은 대문을 수그리고 지나가야 했다. 그의 공부방에 이불을 깔고, 밤 늦게까지 둘이서 토론을 했다. 그룹 토론 때에 보여준 활동가 같은 공격적인 태도와 달리, 정치나 경제의 다양한 이론을 가르쳐주는 상냥한 얼굴의 선배였다.
그는 장차 외교관 시험을 준비해 외교관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나에게도 외교관에 관심이 있으면 함께 열심히 해보자고 했다. 나 역시 관심은 있었지만, 그렇게 단언할 정도의 확신과 자신은 없었다. 일본으로 귀국하기 전에 우리는 주소와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그는 나에게 기념품으로 그가 좋아하는 가요가 들어있는 카세트테이프를 주었다. 당시 한국과는 카세트 테이프의 형태가 같았기 때문에, 그것을 일본으로 가지고 돌아와 일본의 카세트로도 들을 수 있었던 점이 신선했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한두 차례 편지를 교환한 적은 있었으나, 당시에는 이메일도 휴대전화도 없었다.나도 몇 차례 이사를 해 중간에 연락이 끊겨 버렸다. 하지만, 서울에 부임하게 된 나는 반드시 그를 찾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를 찾는 일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가 정말 외교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의 재회에 성공했다. 예전 사진은 없지만 상냥했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첫 외국, 외국인 학생과의 첫 홈스테이여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던 반면, 그는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시켜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고, 그의 공부방 벽에 붙어있던 그의 신조도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가요가 들어 있던 카세트테이프까지. 나는 그 노래들을 파일로 변환해 스마트폰에 넣어 두었다. 이 곡은 30년 전에 선배에게 받은 노래니 들어봐 달라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첫 곡의 도입부 3초 만에 “이건 내가 준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우리의 재회는 우연도 도왔지만, 운명적인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당시 학생교류로 만난 우리가 지금은 각각의 학생교류를 뒷받침하는 처지가 되어 있다. ‘우정’이라는 낯간지러운 단어를 불현듯 떠올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노래는 가수 이문세 씨의 차분한 발라드 곡이었다. 30년간 모르고 있던 가수 이름과 곡명을, 선물해 준 사람에게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수는 지금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