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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년 6월 29일(각주), 조선 국왕 선조가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은 에도성(江戶城)에서 2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와 회견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400년 전의 일이다.
흔히 '조선통신사'로 불리는 이 사절단은 그 해 2월 한양(지금의 서울)에서 '정사(正使)'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의
3사(三使)로 임명되어 총인원 500명 가까운 규모로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뒤, 넉 달에 걸쳐 뱃길과 육로로 여행하여
6월 17일 에도(지금의 도쿄)에 들어갔다. 참고로 당시 최고 권력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이미 쇼군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슨푸(駿府 : 지금의 시즈오카시)로 낙향했을 때라, 통신사 일행과는 귀로에 슨푸의 기요미데라(淸見寺)에서 접견했다고
한다.
실은 당초 이 사절단은 '조선통신사'가 아니라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불렸다. '회답'은 일본 측의 국교
회복 요청에 응한다는 조선의 '교린정책(交隣政策)'의 명분을 나타내고, 또 '쇄환'은 1592년에 출병을 시작해 1598년까지
계속된 임진왜란(文綠慶長の役) 때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 간 조선 사람들을 본국으로 데려오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사절의
파견 경위와 목적을 구체적으로 예시한 명칭이었다.
일본의 침공에 의한 전쟁을 종결시킨 강화(講和) 사절단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죽음을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세력을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 에도에 막부를 연(1603년) 일본 정치체제의 대변화가 성사 요인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1636년에 파견된 제4회째부터 '통신사' 곧 '신의로 통하는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사절'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1811년의 마지막 파견 때까지 200여년간 도합 12차례 일본에 파견되었다. 명칭이야 어찌됐든, 맨 처음부터
양국의 평화 및 우호관계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회 총인원 500명 가까운 이 대규모 평화우호사절단이 한양에서
에도까지 편도만도 몇 달씩 걸려 이동하고 또 에도에서 1달이나 머무는 동안, 일본측은 이들을 환대하는 동시에 선진국 조선으로부터
문물을 배우는 기회로 삼았으니 오늘날의 표현을 빌면 일대(一大) 문화교류행사였던 셈이다.
이 같은 사절이 실제로 파견되기까지의 조선 왕조와 에도 막부 간의 외교교섭도, 또한 통신사의 파견이 정착되고 일행이 머물던
곳마다 일어났던 문화교류 실태의 역사도 저마다 의미가 깊어, 오늘에 이르는 양국 관계사를 이해함에 있어 흥미진진하다.
조선통신사 4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이미 한국에서, 또 연고가 있는 일본 곳곳 에서 다채롭게 거행되고 있고 또 후반기에도
이어질 예정인데, 이들 행사는 400년 전의 양국관계를 전쟁과 강화(講和), 평화 속에서의 교류라는 각 측면에 대해 좀
더 알고 이해를 넓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선통신사의 그 깊고 오랜 역사를 돌이켜보던 중 의외의 사실이 흥미를 끌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지난 5월 미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 방문이 미국과 영국 관계에 있어서의 한
역사적 사건의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여기도 400주년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사건이란 영국이 북미대륙을 식민지(콜로니)로 삼는 데 최초로 성공한, 훗날 '제임스타운'이라 불리는 땅에 '이주자'들이
처음 상륙한 1607년 5월을 말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번 방미는, 그 시점부터 계산하여 4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현재 미국이 영어권 국가인 점으로도 식민지에 건너온 영국의 이주자들이 일으킨 나라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역사는 제임스타운부터
따져도 고작 400년밖에 안 된다.
일본 유학자들이 통신사를 수행해온 조선의 유학자들을 스승으로 우러르며 여러모로 가르침을 청하고 있을 무렵, 북미대륙의
동쪽 한 귀퉁이에서는 영국에서 온 이민자(식민지 이주자)들이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과의 사이에 때로는 도움을 받고 때로는
전투를 거듭하면서 서서히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1607년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한 영국인은 100여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제임스타운만이 오늘날 미국의 발상지는 아니며,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의 미국인 역시 영국인의 후예만은 아니다. 그러나 400년 전의 거점이 오늘날 미합중국의 효시 중
하나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이윽고 뉴잉글랜드로의 이주 확대, 그리고 동부 연안에 순차적으로 수립되고 발전한 13곳의 영국
'콜로니'. 이들이 독립하여 'United States'라는 연방 국가를 세우고, 다시 발전을 거듭하며 이룩된 것이 오늘날의
미국이다.
400년간의 인구증가를 살펴보면, 미국은 맨 처음 100여명에서 300만 배나 되는 약 3억명. 한편 같은 기간에 일본이나
한반도도 인구가 늘긴 했지만, 당시 세계적으로 볼 때 상당한 인구를 거느리고 있었던 양국으로서는 그간 줄잡아야 100배도
안 될 것이다.
물론 인구는 하나의 지표에 불과하지만, 400년 동안에 한쪽은 동아시아에서, 다른 한쪽은 북미대륙에서 이토록 사회의 발전상은
크게 다르다. 어째서일까? 동아시아가 이미 꽤 성숙해 있었기 때문일까? 동양과 북미를 포함한 서양사회의 차이일까? 아니면
같은 서양이라도 북미대륙은 '친정'이라 할 유럽과 달리 특수한 성장을 한 것일까?
역사 속에서의 '시간'은 어떻게 가늠해야 할까? 역사에 '속도'의 개념은 적용되는 걸까?
(날짜와 출전에 관한 각주)
이 특정 날짜를 기술하기까지는 다소 작업을 요했다.
대사관의 추조 가즈오(中條一夫) 서기관에게 조사를 부탁했다.
그는 1607년의 1차 파견 때 '부사'로 일본을 다녀온 경섬(慶暹)의 사행일록(使行日錄) '해사록(海査錄)'의
현대 한국어역판에 기재된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했다.
(일록의 날짜) (양력으로 환산)
한양 출발 1월 12일 2월 8일
에도 도착 5월 24일 6월 17일
국서 전달 6월 6일 6월 29일
실은 조사과정에서 조선통신사에 관한 자료, 특히 일본측 자료에는 국서 전달을 '6월 29일'이라고 한 것과
'7월 29일'이 혼재하고 있어 수수께끼였으나, 추조 서기관은 이윽고 그 답도 "해사록" 속에 있음을 발견했다.
즉 일행이 에도에 도착한 후 국서 전달을 6월 5일에 하기로 일단 결정되었으나 당일 우천이라 다음날로 순연되어
에도에 머물렀는데, 이 날 일록에는 '왜국의 달력은 중국과 차이가 나고…, 올해는 윤달이 4월에
들었기 때문에 오늘이 단오'라는 대목이 있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 해 중국 및 조선 달력으로는 '6월 → 윤6월 → 7월'의 형태로 윤달이 들어 있었지만, 일본 달력으로는
'4월 → 윤4월 → 5월'의 형태로 윤달이 들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에서 온 "해사록"의 작자에게는 그 날이
윤달 전인 6월 5일이었지만, 현지의 일본 달력으로는 윤달 이후인 5월 5일이었던 것이다.
양국 간의 이 윤달의 차이를 간과하면, 특히 일본측의 시각으로 보면 '국서 전달이 있은 음력 6월 6일은 양력으로
7월 29일'이라는 잘못에 빠지기 십상이지만, 실제로 국서 전달 당일인 조선의 음력 6월 6일은 일본 음력으로
5월 6일이며, 양력으로는 6월 29일임이 명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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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일본대사 오시마 쇼타로(大島正太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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