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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풀이여 뛰어난 무사들이 꿈꾸던 자취"(바쇼, 1644-94) 『夏草や 兵どもの 夢のあと』(芭蕉、1644-94)
 
       
       
   

  '여름풀'은 아니지만 철쭉꽃이 만발할 무렵, 서울 교외의 행주산성에 다녀왔다. 일본 사람들에게 그리 잘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임진왜란 때 열세였던 조선 병력이 격전 끝에 일본군한테 승리를 거둔 곳이다.

  나는 해외 근무나 여행의 기회가 생기면 그 나라, 그 고장의 옛 싸움터(古戰場)를 둘러보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행주산성에 간 것도 임진왜란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자 당시의 격전장을 찾은 것이다. 가서 보니 조선군의 무용담과 함께 사적지로 기리고 있었지만 옛 싸움터란 실감은 별로 나지 않고, 지금은 오히려 서울의 전망 좋은 공원으로 아름답게 정비되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늘 전쟁이 따라다녀 그 자취를 더듬다보면 꼭 싸움터와 조우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무려 4년이나 계속된 남북전쟁에서 가장 큰 희생자를 낸 격전지로 알려진 게티스버그가 특별한 감동을 준다.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은 여기서 전사한 북군 전몰자를 애도하는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한 것이다.

  또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 쿠트조프 장군 휘하의 러시아군과 격돌했던 모스크바 근교의 보로지노 전투가 문호(文豪)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을 한 손에 든 채 그곳을 찾아 러시아에게 있어 보로지노 전투의 귀추가 갖는 의미를 곰곰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그간 봐온 많은 싸움터 가운데서도, 유독 첫머리에 나오는 바쇼(芭蕉)의 하이쿠(俳句)를 떠올리게 하는 한 곳이 있다.

  프랑스 남서부 프와티에 근교의 옛 싸움터다.

  문헌에 의하면, 역사상 '프와티에 전투'로 불리는 것은 시대를 달리하여 몇 번인가 있다. 그중 내가 찾은 것은 '투르와 프와티에 전투'라고도 하여, 732년 이슬람교도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지금의 프랑스를 침공해 프랑크 왕국의 샤를 마르텔(카를 마르텔)이 이끄는 기독교도군과 패권을 다툰 곳이다.

  600년대 후반 아라비아 반도에서 탄생한 이슬람교 신도들은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를 파죽지세로 쳐들어가다가 프와티에 근교에서 요람기(搖籃期)의 유럽 기독교 문명권을 대표하는 군세와 운명의 격돌을 벌였다. 결과는 샤를 마르텔의 군세가 승리를 거둬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수호하는 '천하대세를 가르는 전투'가 되었다.

  이슬람교 발상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할 때다. 여름휴가를 이용해 프랑스로 여행을 갔다가 역사 시간에 배운 프와티에 싸움터가 여행지 범위 안에 있음을 깨닫고 불현듯 들러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다지 인기 있는 관광지는 아닌 듯 찾느라 좀 고생했는데, 간신히 당도하고 보니 지금은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보리밭이었다. 주위에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여름풀'은 아니지만 새파란 보리이삭만 바람에 살랑거렸다. 곁에는 관광객을 위한 설명문이 붙어 있고, 또 불어, 영어, 아랍어로 녹음한 해설도 들을 수 있었다. 보리밭을 바라보며 녹음된 내용을, 당시를 상기시키는 "병사들의 함성"을 듣고 있노라니, 참으로 '뛰어난 무사들이 (공명을) 꿈꾸던 자취'에 대한 쓸쓸한 감상(感傷)이 솟구칠 따름이었다.

  사실은 거기 붙어 있던 설명문 속에 이런 감상에서 번쩍 깨어나게 하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이 프와티에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는 한편, 우리가 배워온 것 즉 이 전투에서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교 세력의 피레네 이북으로의 진출을 막아냈다는 것은 속설로 승리자 샤를 마르텔과 그 후계자들(그의 손자가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카를) 대제임)이 권력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개한 선전이니 쉽사리 믿지 말라는 취지의 글이었다. 이 프와티에 외에도 북상하려는 이슬람 세력과 이를 맞아 격퇴한 기독교 세력이 전투를 벌인 장소는 달리 또 있었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보는 안목을 길러주기 위한 가르침인 듯하다. 속설을 믿었던 내게 있어 자국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프랑스인의 자세는 신선했다.

  '뛰어난 무사들의 꿈' : 이 "꿈"을 푸는 것은 '어느 시대'의 '누구'일까.

주한일본대사 오시마 쇼타로(大島正太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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