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넨 아케마시테 오메데토 고자이마스!
新年明けまして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일본에서는 새해인사로 ‘おめでとう(오메데토)’ 즉 ‘축하한다, 경하(慶賀)드린다’고 말하는데, 한국에서는 ‘새해에 많은
복을 받으라’며 상대방의 복을 빌어주는 마음을 서로 전한다. 한쪽은 인사를 나누는 사람끼리 서로 경사로움을 확인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또 한편은 서로의 복을 기원하는 바가 다르다.
그러고 보면 올해는 간지(干支)로 따져 일본은 ‘いのしし年(이노시시도시)’ 곧 ‘멧돼지해’지만, 한국은 ‘돼지해’다.
원래는 똑같이 중국에서 건너온 ‘해(亥)’자를 동물로 표현할 때의 사고 차이 때문에 한국은 ‘재복(財福)’과 연결되는
‘돼지(豚)’로, 일본에 전래되어서는 저돌 맹진(猪突猛進)으로 이어지는 ‘이노시시(猪)’ 곧 ‘멧돼지’가 되었음인가.
아니면 본디 이곳에서는 예부터 ‘돼지’였던 걸까.
지난달 중순 서울에는 꽤 많은 눈이 내렸다.
마침 크리스마스카드랄까 계절 인사장이라고 할까 주로 외국에 있는 벗들에게 연하장을 쓰던 중이었는데, 한 미국 친구로부터
받은 수제 카드에 고양이가 눈 내리는 창밖의 정원을 내다보고 있는 그림에 몇 줄의 시가 적혀 있는 것이 있었다.
영어로 된 시를 직역하면,
창밖을 응시하는 고양이는 이상한 기분이다
수많은 깃털이 춤추며 내려오는데,
작은 새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아
과연 팔랑팔랑 흩날리는 눈(雪)을 고양이의 눈(目)으로 보면 작은 새의 깃털인가, 흥미로운 비유로구나 생각하다가 ‘글쎄다?’
싶었다.
이것은 ‘보탄유키(牡丹雪)’, 함박눈이다.
가랑눈(粉雪)이라면 꽃잎처럼 혹은 작은 새의 깃털처럼 흩날리지 않는다. ‘사르륵사르륵’이라 할까, 내리는 느낌이 다르다.
큰 눈(大雪)은 퍼붓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정말로 추운 곳에서는 함박눈이 내리지 않는다.
이 고양이는 정말 춥고 눈이 많은 고장(雪國)의 고양이가 아니다.
도쿄에서는 함박눈이 오는 적은 있어도 가루처럼 고운 진짜 가랑눈은 내리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 외국에서 진짜 가랑눈을
처음 접했을 때, 부츠 신은 발을 딛자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도쿄의 눈은 이런 소리가 안 난다.
한국의 눈은 어떨까. 물어 보니 ‘보탄유키(牡丹雪)’ 곧 ‘함박눈’이란 말이 있단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도 이 고양이의
심경을 알 거다.
하지만 ‘눈’ 하면 가랑눈밖에 모르는 곳에서는, 왜 눈이 새의 깃털에 비유되는지 모르리라.
사람은 자신이 처한 자연적, 사회적, 문화적인 환경 속에서 사물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 사이의 ‘돼지’해와 ‘멧돼지’해의 차이는 어떤 환경의 차를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간지가 일본에
전래된 시기와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하는 습관이 사라진 무렵과의 전후관계는 모르겠지만, 일본의 생활습관 속에 돼지가
없었던 것이 큰 듯하다. 그래서 일본 각지에 있는 ‘산돼지’ 즉 ‘멧돼지’가 되었나 보다.
한편, 이곳에서는 돼지가 다산(多産)과 번영, 그리고 복의 상징으로 사랑받고 있는 모양이다. 올해는 ‘돼지해’ 중에서도
60년 만에 돌아오는 ‘붉은 돼지’해로 행운을 가져온다 하며, 더욱이 600년 만에 한 번꼴인‘황금돼지’해라 하여 붐이
일고 있다. 허나 600년 만에 돌아오는 귀한 해라는 속설의 근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붉은 돼지’해라는 말에 일본의 장편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紅の豚)’를 떠올렸다. 영화에서 돼지를 다룬 예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국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도 분홍색의 봉제 돼지인형이 나온다. 왠지 코믹하고 밝다.
돼지는 밝고 복 많은 이미지다. 올 한 해, 저돌 맹진으로 앞서 달리지만 말고 다복한 해가 되시기를!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주한일본대사 오시마 쇼타로(大島正太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