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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 대형 태풍 ‘산산’이 일본을 강타, 강풍과 호우로 10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나왔다. 그런데 이 태풍 뉴스를 보면서 지난달의 칼럼을 떠올린 분이 있었을까. 사실 나는 놀라움이 컸다. ‘산산’은 바로 2차 원나라 침공인 1281년의 ‘고안노에키(弘安の役)’ 때와 마찬가지로 이마리만(伊万里灣)과 하카타만(博多灣) 근해를 휩쓸었던 것이다. 이번 태풍이 현대의 기술로 예보나 재해방지 태세가 갖춰져 있어도 엄청난 피해를 가져올 만큼 강렬했던 것을 보면, 인지에 한계가 있었던 700여년 전 태풍으로 말미암아 대함대가 궤멸했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건 그렇고, 9월의 맑고 푸르른 멋진 가을날 도봉산에 갔다. 망월사역에서 가까운 등산로로 들어갔는데, 이 주변은 사람이 별로 없어 인적이 뜸한 길을 한참씩 오르곤 했다. 능선에 이르러 만장봉이 가까워지면서야 사람들과 한 무리를 이뤘다. 등산하기엔 딱 좋은 날씨라 서울시내의 교통정체처럼 발길이 막힐 때도 있었다.
몇 시간 후 산을 내려가 도달한 곳은 도봉산 등산로 입구. 점심때가 지났을 무렵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길 좌우에 늘어선 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 시끌벅적 흥겹다. 한국에서 등산과 하산 후의 식사는 한 세트인가 보다.
좀 더 역 쪽으로 길을 내려가니 노래방이 보이고, 등산복 차림의 중년 커플 두 쌍이 막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등산, 식사, 그리고 노래방 코스도 있는 모양이다. 조금 더 가자, 이번에는 할아버지 몇 팀이 평상에 마주앉아 장기에 열중하고 있다. 이들은 필시 하산 팀이 아니라 근방에서 모인 동네 분들인 듯싶었다.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는 모습은 일본에서도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한국의 ‘장기'와 일본의 ‘쇼기'는 닮은 듯 다르다. 서양의 체스와도 맥을 같이하는 비슷한 게임이지만, 자세히 보면 여러모로 다르다.
특히 두드러진 차이는 말의 생김새다. ‘장기'는 정팔각형에, 청색과 적색 글씨로 ‘楚(초)'와 ‘漢(한)'이라 써서 편을 가르고 있다. 한편 ‘쇼기'는 끝이 뾰족하고 길쭉한 모양새의 오각형으로 말을 놓을 때의 방향으로 편을 가르되, 말 자체는 똑같아서 적과 아군의 구분이 없다.(사진을 비교해보시기 바람.)
이는 ‘쇼기'의 룰에서 연유한다. ‘장기'는 체스와 마찬가지로 한 번 잡힌 말은 장기판에서 영영 사라지지만, ‘쇼기'는 말을 ‘잡으면' 옆에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자기 말로 다시 쓸 수가 있다. 말의 숫자가 무한대에 가까운 셈이다. 머리를 상대 쪽으로 향하기만 하면 자기 말이 되도록 생김새부터 그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룰은, 일본 역사상 봉건영주인 다이묘(大名)끼리 패권을 다투던 전투 중에 포로가 되더라도 자신을 붙잡은 ‘적장'인 다이묘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하고 그의 수하가 되어 다음 전투에 나가는 일이 흔했었는데, 그 같은 전투 실태가 ‘쇼기'의 룰에 반영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정말일까? 그러나 이곳에 부임한 후의 경험으로 인해 다소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7월의 칼럼에 나오는 ‘신안 보물선' 이야기를 기억하시는지요. 그 때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신안 앞바다에 침몰한 이 배에서 인양된 유물 가운데 일본 ‘쇼기'의 말이 있었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신안실'의 전시 유물 속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원나라에서 일본으로 청자를 실어 나르던 배에는 일본인 뱃사람이 타고 있었던 걸로 여겨진다. 적재했던 짐 이외의 일상용품으로도 이를 헤아릴 수 있는데, 이들이 소일 삼아 ‘쇼기'를 두었던 것 같다. 이 배에서 찾은 일본 ‘쇼기'의 말을 보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이 배가 항해에 나선 것은 1300년대 전반, 1320년대라는 설도 있다. 일본 ‘쇼기’가 이미 그 때부터 현재와 같은 형태였음을 보여주고 있어 참 놀랍다. 작은 발견이었다.
‘쇼기’는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룰과, 그에 따른 말의 모양이 완성되었을까. 신안 앞바다에 배가 침몰한 시기는,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로 아직 무사들이 전투로 지새우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되기 이전이었다. 그렇다면 가마쿠라 시대보다도 앞선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 무사가 출현했을 당시부터 주군(主君)을 바꾸는 일이 흔했던 걸까.
아무튼 무사의 용병술을 본떠 ‘쇼기’에서도 잡은 말을 되쓸 수 있는 현재의 룰이 정립되었다는 것은 ‘신안 보물선’에서 발견된 ‘쇼기’의 말을 보면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신안 보물선’이 원나라에서 일본으로 출항한 것은, 1281년의 ‘고안노에키’라는 원나라의 2차 침공으로부터 수십 년밖에 지나지 않아서다. 그 사이에 일찍이 적으로 대치했던 양국이 이를 극복하고 알찬 무역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원나라의 배 위에서 일본인 뱃사람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쇼기’를 즐기고 있다...
비록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왠지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주한일본대사 오시마 쇼타로(大島正太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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