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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월드컵으로 뜨겁게 달아올랐으나 일한 두 팀 모두 아쉽게도 16강에 들지 못하는 바람에 7월은 다른 나라 팀의 활약을 구경하는 데 그치고 있다.
그런 6월 중순께 전주에서 일한 국회의원 축구팀의 정례 친선경기가 있었던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결과는 3대 2로 한국 국회의원 팀이 승리했다. 실력 차이로 보아 온당한 일로 오히려 점수 차가 더 크게 벌어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금요일에 이번 회기의 국회가 실질적으로 끝남에 따라, 토요일 아침 하네다(羽田)를 떠나 김포에 내린 일본 국회의원들은 곧장 버스로 3시간을 달려 전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경기 후 교류 만찬회에 참가한 뒤, 이튿날 아침 왔던 길을 고스란히 되짚어 일요일 안에 일본으로 돌아간 의원들이 많았다. 이런 형태의 교류가 가능한 것도 바로 이웃해 있는 양국이기 때문이다.
한데 그곳 전주에서 경기 시작 전의 시간을 틈타 국립전주박물관을 찾았다. 마침 ‘전북의 고려청자-다시 찾은 비취색 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도자기라고 하면 우선은 중국, 이어서 조선, 그리고 일본이 저마다 높은 수준의 것들을 세상에 남기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고려청자는 특히 뛰어난 것 중 하나다.
이 특별전은 전시품이 훌륭한 데다 설명도 친절하고 정중해서 이런 좋은 전시회를 정말이지 우연히 만나게 되어 기뻤다.
그 중에서도 나는 한 전시품에 매료되었다.
이 특별전시의 카탈로그를 다시 보니 ‘물가풍경무늬 완(찻그릇) 靑磁象嵌柳蘆水禽文碗’이라고 나와 있다.
하고많은 전시물 중에 어째서 유독 이것만 저마다 뛰어난 딴것들과 달리 한결 강한 인상으로 남는 것일까. 왜인지 이유는 모르지만, 짙게 인상에 남아 뚜렷한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과거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언젠가 한 박물관에서 북송(北宋)시대의 도자기를 보고 강렬한 충격과도 같은 아름다움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거기서 이 도자기가 ‘여요(汝窯)’ 것임을 알았는데, 본시 ‘여요’의 것으로 보이는 도자기는 이제 세계적으로 70점 정도밖에는 현존하지 않는 모양이다. 객관적으로는 이런 희소가치도 거들어 진중(珍重)히 여기고들 있는 듯한데, ‘희소가치’ 운운은 나중에야 안 일로서 선입관 없이 첫눈에 그만 압도된 것이다.
수많은 청자를 나아가서는 도자기를 여러 곳에서 그리고 여러 상황 아래서 보아왔건만, 별안간에 특정한 것이 마치 전생의 인연을 예고도 없이 불쑥 만난 것처럼 마음속에 남는 것이 뭐라 형언할 수 없이 불가사의하다. 사람의 심리문제일까, 그 도자기의 속성인 것일까...
전주의 특별전에는 침몰선에서 인양된 도자기들도 발굴 배경과 복원 과정(해저에 오랜 세월 묻혀 있던 데서 오는 부착물 처리 등)에 대한 해설 등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침몰선의 이야기는 서울에 부임한 뒤 중앙박물관에 갔다가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원대(元代)의 청자를 접한 이래 관심이 깊어졌던 터라, 전주의 전시도 새로운 지식으로서 흥미 깊었다. 또 광주의 박물관, 목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등 이미 몇몇 곳을 둘러보면서 더욱 흥미가 일었다.
신안의 침몰선, 일명 ‘신안 보물선’은 1300년대 전반의 것으로 추정되며, 원나라에서 청자를 싣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조난을 당해 목포 앞바다에 침몰했다가 600여년이 지난 후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찌된 연유인지, 중국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화물 속에서 고려청자도 발견되었다.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고향에 돌아온 셈이다.
도자기와 해상무역이 중국, 조선, 일본을 잇고 있었던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건 그렇다 치고, 개인적으로는 전주에 있던 ‘물가풍경무늬 완(찻그릇)’을 언젠가 꼭 다시 보고 싶다.
주 : ‘여요(汝窯)’는 송대(宋代)의 5대 명요(名窯) 중 하나로 중국 하남성 보풍현(河南省寶豊縣)에 소재했음. 여주(汝州) 관할의 가마라 하여 ‘여요’라 불렀는데, 비 갠 뒤의 하늘빛을 닮은 ‘천청(天靑)’과 집오리알의 빛깔을 띤 ‘난청(卵靑)’색 자기로 유명함.
주한일본대사 오시마 쇼타로(大島正太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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