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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미가세키(霞ヶ關), 안개, 꽃안개, 벚꽃……성북동의 꽃안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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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의 내 글을 한 신문 칼럼니스트가 기사에서 언급했다. 독자가 있다는 사실에 새삼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그런데 그 기자 분이 지적하신 대로, 나는 이 칼럼에서 정치문제는 다루지 않으려 한다. 한국에서의 나날의 생활 속에서 느낀 점, 이를테면 심상(心象)의 풍경을 적어 나갈 생각이다. 이런 나의 뜻을 이해해주시면 다행이겠다.)
바야흐로 봄, 벚꽃의 계절이다. 성북동 뜰의 벚나무도 한창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지난달 말, 업무 관계로 일시 귀국했을 때다. 외무성 앞의 벚나무 길을 비롯하여 도쿄의 벚꽃은 거의 활짝 피었었다. 일 때문에 여기저기 바삐 움직이느라 느긋이 즐길 기회는 적었지만, 길 건너 농수산성으로 걸어가다 사진을 찍는 사람을 보며 벚꽃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었다.
올해는 도쿄와 이곳에서 두 번이나 벚꽃을 감상할 수 있다니...
벚꽃은 왠지 일본인에게는 감동을 부른다. 나는 문학에 문외한이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으나 和歌(와카), 俳句(하이쿠), 能(노), 회화 등 벚꽃을 주제로 한 작품은 숱하다. 그중 하나가 西行法師(사이교 호시:1118-1190년)가 노래한 다음과 같은 와카다.
바라노니 봄날 꽃나무 아래 죽고 싶어라
벚꽃 만발한 음력 이월 보름달 뜰 때
솟구치는 정념에 가슴 뭉클하다.
이야기가 바뀌지만, 어떤 한국 분과 환담을 나눌 때다. 미국 국무성은 ‘Foggy Bottom(안개 바닥)’, 일본 외무성은 ‘霞ヶ?(가스미가세키)’라고들 하는데, 어째서 양쪽 모두 왠지 몽롱하고 자욱한 투명성이 없는 ‘霧(기리)’니‘霞(가스
미)’니 하는 말에 비겼는가를 물었다.
그야 각기 국무성과 외무성 건물이 있는 워싱턴과 도쿄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그렇게 고지식한 대답으로는 이 질문이 은근히 내포하고 있는 외교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로는 같은‘안개’지만 일본어의 ‘霧(기리)’와 ‘霞(가스미)’는 어감이 다르다.‘霧(기리)’는 왠지 어둡고 그늘이 있는 느낌인 반면, ‘霞(가스미)’는 밝은 어감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하며, 그 예로 ‘花霞(하나가스미)’란 표현이 있음을 인용했다.‘花霞(하나가스미)’는 직역하면 ‘꽃안개’라고 할까.
마침 외무성 앞의 벚꽃을 보고 서울에 막 돌아온 참이라 마음이 담긴 설명이었다.
‘花霞(하나가스미)’란, 벚꽃이 만발했을 때 좀 멀찍이서 보면 연분홍 꽃무리가 마치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보인다 하여 붙인 말이다.
이 같이‘霞(가스미)’는 몽롱한 가운데도 오히려 좋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을 형용하고 있다.
하긴 그 자리에서는 그리 대답했지만,‘霞(가스미)’란 어감이 궁금해서 나중에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역시 俳句(하이쿠)를 지을 때는 춘하추동 사철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반드시 삽입토록 되어 있는 ‘季語(기고)’로서 ‘霧(기리)’는 가을, ‘霞(가스미)’는 봄을 나타낸다고 한다. 霞(가스미)는 화창하고 밝은 봄철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똑같이 ‘가스미’라고 읽는 ‘霞’ 혹은 ‘かすみ’라는 여자 이름은 있어도, 그와 반대로 ‘霧(기리)’란 이름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霞ヶ關(가스미가세키)’는 외무성과 그 밖의 성청(省廳)들이 늘어선 도쿄 관청가의 예로부터의 지명이다. 아마도 江戶(에도) 시대부터 이미 있었던 지명이 아닌가 싶다. 문헌에 따르면 明治(메이지) 시대에는 정식 지명으로 등재된 까닭이다. 하나 그 때부터 이곳에 그토록 많은 벚나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霞(가스미)’ 에 얽힌 또 하나의 지명으로는 ‘霞ヶ浦(가스미가우라)’가 있다. 이것도 오래된 지명이지 싶은데, 도쿄에서 볼 때 成田(나리타) 공항을 더 지난 곳에 있는 利根川(도네가와) 하구 근처의 큰 호수로 여기는 벚꽃도 유명하지만 수향(水鄕) 곧 ‘물의 고장’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중학생 시절, 영화를 자주 보게 되고 나서의 일이다. 어느 땐가, 今井正(이마이 다다시) 감독의 ‘쌀(米)’(57년)이란 작품을 친구와 함께 보았다. 바로 이 물의 고장 가스미가우라를 무대로 한 인간 군상을 그린 이야기로 처음 어른 영화를 본 듯한 기분이었다.
이 영화는 당시 차츰 보급되기 시작하던 ‘총천연색’으로, 가스미가우라에서 빙어잡이를 하는 크고 독특한 하얀 돛을 단 배들이 일제히 호수로 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새하얀 돛과 파란 하늘, 그리고 호수가 화면 가득히 펼쳐지는 그 아름다운 대비에 숨 막힐 듯한 감동을 느꼈다. 지금도 그 광경이 뇌리에 아로새겨져 있다. ‘霞(가스미)’란 얘기에 이 영상도 떠올렸다.
이렇듯 나에게‘霞(가스미)’란 말은‘花霞(하나가스미)’‘霞ヶ關(가스미가세키)’‘霞ヶ浦(가스미가우라)’ 등등 늘 긍정적인 이미지다.
서재 창밖의 벚꽃이 만개하여‘성북동의 꽃안개’가 될 날도 이제 금방이다.
그러고 보니 ‘霞ヶ關(가스미가세키)’나 ‘가스미가세키 외교’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한국 외교당국의 호칭은 무엇일까.
외교통상부 건물이 광화문 앞에 있으니‘광화문’ 또는 ‘광화문 외교’라 불리고 있을까...
주한일본대사 오시마 쇼타로(大島正太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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