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エイの森)>을 쓴 것은 1987년이었다. 진초록과 빨강의 단색 커버 장정에 ‘100% 연애소설’이라는 광고 문구가 들어간 띠지를 두른2권의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에 올라 800만부 이상 팔리며 하나의 사회적 사건으로 매스컴에서 다뤄지기에 이른다.
이윽고 한국에서도 번역된 이 작품은 기록적인 판매를 보이며, 무라카미 하루키를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만, 한국에서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바뀐 게 흥미롭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로움’은 80년대 후반 서울에 민주화의 바람이 한창 강하게 불고 있던 가운데 역시 하나의 시대적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었을까.
일본에서도 과거 새로운 작가 특히 젊은 세대를 그리는 작가가 등장할 때마다 그 ‘시대성’이 클로즈업되던 시기가 있었다는 느낌이다.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최근에는 무라카미 류(村上龍).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젊음은, 그들이 사는 시대와의 갈등으로 묘사되며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작품에는 분명하게 시대와 마주보며 싸움에 도전하는 주인공은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오히려 살아 있는 인간의 지문(指紋)이 주의 깊게 지워져 있다. 그들은 홀로 소박한 집에 살며 비주류지만 듣기 좋은 재즈나 클래식 음악을 즐기고, 냉장고 속에 있는 재료로 그럭저럭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지적이
지만 관리 책임이 따르지 않는 반(半) 자유업에 종사하며, 서로 지나치게 구속하지 않는 관계의 여자 친구가 있다. 이는 기분 좋게 닫혀진 폐쇄공간의 생활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상처를 입히려면 상대방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야 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風の歌を聴け)>나 <1973년의 핀볼(1973年のピンボール)> 의 주
인공들은 그 사정거리를 정확히 가늠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으며, 얼마나 자연스럽게 그 외연을 계속 달릴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식으로 달려 마침내 도달하는 곳은 어디일까? 필시 그 어디에도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거기에는 짙은 허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만, 전통적인 일본의 사소설(私小說)처럼 파멸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끈기 있는 장거리 육상선수처럼 그들은 자신만의 레이스를 이어가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실제 장거리 육상선수로서 매년 한 차례는 정식 마라톤을 뛰며, 철인 3종 경기에 참가한 경험도 풍부하다. 그다지 ‘개인사’적인 문장을 쓰지 않는 이 작가가 드물게도 작가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역은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走ることについて語るときに僕の語ること)> 라는 제목의 엣세이에 서 육상선수로서의 자신의 궤적과 작가로서의 발자취를 동시에 병행해서 이야기하는 형식
을 취한 점도 매우 흥미롭다.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1970년대 말의 일본은 그로부터 10년 전, 20년 전의 상황과는 달리 정치 부재의 시대였다. 일본경제가 강력한 수출 기계로서의 존재감을 더욱 높이며 소비문화는 백화 만발하는 느낌이었지만, 젊은이들은 정치적인 자기표현의 장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데뷔하기도 전부터 극장이 도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배우처럼… 이런 가운데 자신의 설 자리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무라카미
의 초기 소설은 장거리를 달리는 행위(현실적으로나, 비유로서도)를 통해 그 과제에 답하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접근 방식은 아마도 작가의 기대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독자를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국가에서 얻게 했다. 세계화와 인터넷은 언뜻 젊은 세대에게 자기표현의 장을 넓혀준 듯 보이지만, 너무 쉽게 발신할 수 있는 매체를 얻음으로써 되레 그 앞에 멈춰설 수밖에 없는 사람의 수도 늘어나게 한 듯싶다. 그 속에 내재하는 세상의 숨은 악의 같은 것에 말려들지 않기 위한 하나의 힌트를 무라카미 작품은 제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 마라, 달려라고.
그런데 한국의 젊은 독자들은 여기서 무엇을 읽고 있는 걸까. 쿨한 개인주의적 인생
관을 특별히 자랑하거나 비하하지도 않으며 지키는 주인공에 대한 공감은 많은 나라의 독자들도 공통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뿐만은 아니다. 맨 앞에서 인용한 글은 연인을 잃은 주인공과 그를 이해하고 격려하려는, 자기 자신도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연상의 피아니스트 출신 여성의 대화인데, 한국 친구 가운데 한 명이 이 부분을 특히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노르웨이의 숲>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 반드시 뛰어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오히려 그 원형의 하나가 되었다고 보는 단편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인(めくらやなぎと眠る女)> 쪽이 완성도는 높다), 여기에 감도는 정서는 아마도 일본인과 한국인이 매우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감성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공통적인 감성의 존재는 장차 일본과 한국의 교류에 있어 서도 소중한 자산이 아니겠는가. 다시 장거리 달리기에 비유한다면, 자신이 달리는 발소리를 듣는 우리들의 귀는 같은 리듬을 듣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