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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일본대사관 영사부 참사관
스즈키 미치하루(鈴木道治)
12월의 첫 주말 오후, 아파트에서 담배를 피우며 반짝이는 한강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한 달 만의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나른한 한때, ‘아아, 내 집이 좋구나! ’ 하고 절로 중얼거리며 또 한 모금 ‘후욱’.
2007년 3월 서울에 부임할 때부터 신세를 져온 동부이촌동의 이 아파트. 지은 지 34년이나 되어 사방이 낡고 파손되어 작년 겨울에는 온돌 배관의 여기저기서 물이 샜다. 우리 집 천장에서 물이 떨어진 것이 두 차례, 올봄에는 우리 집 바닥에서 아래층으로 물이 새기도 했다. 마침 난방을 끊어도 될 때라 우선 가정용 수도관을 완전히 닫아 물의 흐름을 막고, 물이 새는 곳을 찾아 수리하는 것은 아랫집의 형편도 있고 하여 9월말 내 여름휴가 때 1주일 정도 집을 비우고 공사를 하기로 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나면 공사가 끝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간단히 손보는 걸로는 어림도 없어 바닥을 죄다 벗겨내고 파이프도 모조리 교체하는 대대적인 공사가 필요하단다. 공사 기간 한 달간은 아파트를 비울 수밖에 없는 사태가 된 것이다.
서두가 길어졌지만, 이런 연유로 11월 꼬박 한 달 동안 괴로운 호텔살이를 했다. 마치 한 달간 감옥에라도 들어간 기분으로!
11월 1일(일) 오후, 모 호텔에서 담배를 피우며 서울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앞으로 한 달을 이 방에서 어떻게 산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면서 또 다시 ‘뻐-끔’.
11월 둘째 주 토요일, 아침식사 후 호텔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 청소하는 데 거치적거릴 뿐이지 하고 벌떡 일어나 우선 밖으로 나섰다. 어디로 간다지?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청계천으로 향했다 . 건들건들 물이 흐르는 방향 즉 하류 쪽으로 몇 십 미터를 가다가 문득 물속을 들여다보니 숱한 작은 물고기들이 떼지어 헤엄치고 있다. 이런 도시 한복판에, 인공적으로 되살린 시냇물에! 이 작은 물고기는 어디서 왔을까? 등등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기분으로 다시 하류 쪽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흐름이 완만한 곳에 커다란 잉어 떼가, 그리고 물가에는 분명히 인공적으로 심은 게 아닌 자연의 풀과 나무도 있다. 자연의 강한 재생력에 감격하면서 위를 올려다보니 ‘평화시장’ 간판이 보인다. 거참, 어느새 동대문일세. 잘도 걸어왔네 하고 감탄하며 다시 하류로. 이번에는 오리 몇 쌍이 사이좋게 짝지어 날개를 가다듬고 있다. 그 정다움과 따사로운 분위기에 취해 바라보는 것도 잠시, 어찌 나는 혼자? 오리마저도(인권이 아닌 오리의 권리(?)란 게 있다면 ‘…마저도’란 표현에 성을 낼 테지만) 둘씩 짝을 지어 있는데, 거듭 ‘어찌 나는 혼자서?’ 하며 뚫어져라 늦가을의 흐릿한 하늘을 노려본다. 그러자 저 앞에 ‘마장동’이란 이정표가 들어온다. 그 옛날 도살장이 있었던 관계로 지금도 값싸고 맛좋은 고기 전문점들이 처마를 잇대고 있을 터라 저절로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이 작은 흐름이 큰 물줄기의 한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곳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은 있으되 평소의 운동부족과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몇 킬로미터 앞에서 다리가 완전히 풀려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왕복 도보의 예정도 하는 수 없이 변경하고 택시로 귀가(?) 길에 올랐다. 토요일 오후의 을지로 길이 어찌나 막히던지 가외로 택시 요금이 꽤나 들었지만, 조명기구랑 타일 도매점들이 늘어선 거리를 차창 너머로 천천히 구경할 수 있어서 그 나름대로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이후에도 호텔에 묵는 30일 동안 토요일, 일요일이 7번 들어 있어(그 중 이틀은 비) 그 기회에 평소 잘 다니지 않던 곳을 어슬렁거렸는데, 그 가운데 인상에 남은 몇 곳을 소개한다.
늦가을의 서울편 : 호텔 남쪽의 한국은행 옆길. 은행나무 가로수가 곱게 단풍져 마치 길에 노란 카펫을 깔아놓은 듯하다. 또 덕수궁 돌담길도 담장 위에 얹은 기와지붕과 가로수가 어우러져, 예술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스케치를 하거나 사진을 찍고 싶어질 만큼 운치가 있다. 다만 나는 그 방면에는 센스가 젬병인 데다 카메라도 없고, 또 예술의 계절 가을 따위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멋없는 사람이다. 나에게는 오직 식욕의 가을이 있을 뿐. 좀더 발길을 옮기면 덕수궁 뒤쪽에 있는 미국 대사관저의 담장에서 새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바람에 실려 팔랑팔랑 떨어진다. 도무지 대도시 서울 한복판의 경치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림이나 사진으로 담고 싶었던 곳이 있다. 명동성당 정면에서 오른쪽을 봤을 때다. 빌딩가 저편에 떡하니 자리잡은 남산, 그 위에 우뚝 선 늘씬한 서울타워, 드넓게 펼쳐지는 맑고 파란 하늘, 바로 눈앞에는 빨갛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정말 아름다웠다. 원래 시적 감각도 없고 공무원 생활을 오래한지라 소위 딱딱한 문장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이 정도밖에 표현을 못하니 그 다음은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에 맡긴다.
향수(鄕愁) 편 : 간단히 말하면 나의 서울근무는 20여년 전과 10년 전, 그리고 이번으로 3번째다. 옛날 동료나 벗들과 마음껏 먹고 마시며 돌아다녔던 북창동, 다동, 무교동을 어술렁거렸으나 당연히 재개발 등으로 인하여 당시의 자취가 남아 있는 가게는 별로 없이 왠지 차가운 느낌의 유리와 콘크리트 빌딩들로 바뀌고 말았다. 그래도 소위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게 사실이라 머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 10년 전으로 미끄러져 돌아간다. 20년 전 불고기며 소금구이를 자주 먹으러 다녔던 ’오륙도’를 발견했다. 당시는 산낙지를 파는 가게 몇 채가 나란히 있는 골목길을 빠져나가면 화려한 캬바레 간판 뒤편의 단층집이었으나, 지금은 깔끔한 빌딩 안에 있다. 맛은 어떨까? 식사는 된장찌개뿐이었지만, 작은 질그릇에 담겨 맛이 그만이었는데. 10년 전 자주 왔던 ‘전주회관’의 참 예쁘고도 귀여운 아가씨. 그 사랑스러운 손으로 나르던 것이 저 유명한 홍어다.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와 미인이라! 그 때는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길 몇 번이던가. 이 가게는 예전 그대로다. 한데 가게 앞의 비탈길이 이렇게 급경사였나?! 이건 내 배가 심하게 나온 탓임을 나중에야 호텔 거울 앞에서 자각했다.
이런 것들을 체험하고 느낀 호텔살이 30일도 무사히 지나고, 12월 1일 마음도 가볍게 호텔에서 ‘출소(出所)’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12월 2일과 3일의 이틀 밤 연이어 도쿄에서 출장 온 사람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그간 지낸 호텔 1층 커피숍에 와 있는 나. 이대로 어제까지 묵었던 방으로 올라가면 5분 후엔 따뜻한 침대에서 코를 드르렁거리고 있을 텐데 ‘세상사, 마음대로 안 되네!’ 체념하고 차디찬 겨울 하늘 아래 택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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