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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공간과 일한교류
 
       
     
   

주대한민국일본국대사관 총괄공사
다카하시 레이이치로(高橋礼一郎)



  RPG라는 말을 신문, 잡지에서 자주 접하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RPG란 롤 플레잉 게임(Role Playing Game)의 약자인데 내가 대학생 시절,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단골 찻집의 주인이 프로 마술사이자 보드게임 수집가라 가게에는 당시 일본에 막 소개됐던 진귀한 게임이 몇 개나 놓여 있었다. 그 중 하나가 D&D(Dungeons & Dragons)였다. 불을 내뿜는 용에 맞서는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 일러스트가 상자 겉에 그려져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이 게임을 가게 주인이 테이블토크 RPG 가르쳐 주었다.

  지금이야 RPG 하면 일본에서는 드래곤 퀘스트, 한국에서는 리니지 같은 컴퓨터게임을 바로 연상하지만, 원래 RPG는 미국에서 테이블을 둘러싸고 여러 명의 플레이어가 모여서 노는 실내 보드게임이었다. 장기나 체스처럼 2명이 마주 앉아 명확한 규칙 아래 승패를 겨루는 게임과는 달리, RPG는 복수(통상 4,5명)의 플레이어와, 자신은 게임에 참가하지 않고 게임의 규칙, 배경, 플레이어가 달성해야 할 과제를 제시하며 게임 진행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고 다양한 판정을 내리는 ‘게임마스터(이하 마스터)’라 불리는 이른바 ‘전능’한 심판관 역할이 필요하다. 플레이어는 각자 기본 능력의 수치화가 요구되며, 보통은 주사위와 자신의 선택으로 게임 초에 이를 결정하게 된다. 체력, 지력, 순발력, 운 같은 요소를 숫자로 나타내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역할을 배정하기 때문에 플레이어 개개인의 개성이 탄생하는 것이다. 게임의 흐름은 마스터가 줄거리를 말하고, 고비마다 플레이어들에게 선택을 종용하며 진행해 간다. 플레이어의 직업은 그 능력의 배분에 따라 전사, 마법사, 도둑, 승려 등으로 나뉘며 각자가 잘하는 분야에서 마스터로부터 주어진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협력해 간다.

  체스, 장기, 바둑 같은 전통적인 실내게임은 게임이론을 빌리면 ‘완전 정보에 의거한 제로섬 게임’ 이다. 규칙은 명확하고 반상의 정보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완전히 공개된다. 승패의 판정은 의문의 여지도 없는 형태로, 한쪽의 득이 상대의 손실이 되어 나타난다. RPG의 신선함은 지금까지 누구도 의문시하지 않던 게임의 전제조건을 일단 백지로 돌려, 어떤 규칙을 만들고 이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그 자체를 플레이어의 자유에 맡긴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테이블토크 RPG를 해보면 너무도 자유로운 것에 놀라게 된다. 심판역할의 마스터는 물론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기본 스토리의 흐름과 단계에 따라 어려워지는 달성목표를 플레이어에게 제시하며 게임진행을 관리하지만, 국면에 따라서는 상정된 시나리오대로 행동해준다고만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마스터가 플레이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굳게 열쇠가 잠긴 문이 눈앞에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문을 발로 차 부술까? 열쇠를 따 볼까? 단념하고 떠날까?” 이에 대해 플레이어는 의논하고 행동을 결정하는데, 이 가운데 흥미로운 발상을 하는 사람이 있어 “집이니까 창문도 있을 것이다. 뒤로 돌아가서 창문으로 들어가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스터가 “유감이다. 창문에는 쇠창살이 끼워져 있어 절대 못 부순다”고 거부할 수도 있지만, 마스터의 판단으로 플레이어의 재미있는 의견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즉 그 자리에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버린다. “창은 있다. 단 작아서 건장한 남자는 들어갈 수 없다.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담한 체격의 여성뿐이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기존의 규칙이 담긴 책에는 적혀 있지 않는 선택을 제시하며 게임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RPG의 좋은 마스터는 이런 국면에서 유연성을 발휘, 될 수 있는 한 플레이어의 창의적인 생각에 응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당연히 재미있는 행동의 성공 여부를 어떻게 판정할 것인가(통상 주사위나 플레이어의 능력 정도로 이를 정할 수 있는 차트를 마스터는 갖고 있으며, 이를 응용하여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마스터의 수완이라 하겠다)는 전체의 균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나름대로 어려운 판단이지만, 여기서 포인트는 RPG에서 게임 마지막에 승패를 정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일단 최종 목표(보화를 손에 넣는다. 마왕을 물리치고, 잡혀 있는 공주님을 구한다 등)는 설정되어 있지만, 게임의 즐거움은 최단 거리로 이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도중에 옆길로 빠져 목표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마스터와 플레이어의 호흡이 맞아 예상치 못하던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플레이어가 있어도 좋다. 롤 플레이란 ‘연기한다’는 것이며, 즉흥적인 연기로 결말을 바꿔가는 높은 자유도야말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테이블토크 RPG는 결국 극히 일부 애호가들끼리 즐기는 선에서 그치고 널리 붐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플레이를 위해서 어느 정도 사람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되고, 자유도가 높아 한 게임당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익숙한 마스터 없이는 쾌적한 게임 진행이 어렵다는 등 제약이 많았던 까닭이 크다. 확실히 한 게임에 4~5시간 걸리는 경우가 허다하고, 중단되면 다시 같은 멤버를 모으는 데 애를 먹게 된다. 

  이러한 제약을 단번에 해결하고 RPG를 메이저로 끌어올린 것이 컴퓨터 게임의 보급이다. 과연 컴퓨터는 이상적인 마스터가 될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공평하고, 계산이 빠르며, 전원만 켜면 언제든지 게임 상대가 되어 준다. 게다가 그래픽 표시기능의 향상으로 지금까지는 상상 속에만 있던 게임 세계를 아름다운 비주얼로 실제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첫 히트작은 미국에서 태어난 ‘위저드리(Wizardry)’였다. 필자는 80년대 중반, 일본에서 막 발매된 MSX2라는 컴퓨터(라고 해도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유치한 물건으로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장착한 것이 팔리던 시대였다)로 처음 해보았는데, 단순한 선만으로 표현된 지하 12층까지의 미궁 속을 모눈종이에 직접 지도를 만들며 탐색해가던 손맛이 그립게 떠오른다.

  그런데 미국에서 만들어진 컴퓨터 RPG가 아시아에서는 일한양국의 손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게된다. 우선 일본에서는 누가 뭐래도 발매될 때마다 200만개, 300만개 단위로 팔리는 괴물 게임 ‘드래곤 퀘스트’의 존재가 있다. 미국산 게임과 비교해서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조작의 편리함이다. 누구나 간단히 조작법을 익혀 게임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잘 짜인 시나리오의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게임이 진행되고, 좀처럼 막히는 일이 없다. 도중에 싫증나지 않도록 메인 줄거리 외에도 작은 과제를 해결하거나 특별한 아이템을 모으는 등 이른바 샛길로 빠지는 즐거움도 준비되어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등장하는 캐릭터에게 미리 꽤 상세한 설정을 해두는 경우가 많다. 영웅, 여주인공, 조연, 악역, 성격, 능력, 약점 등이 자세히 설정되어 있어, 플레이어는 이 가운데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할 것인가를 무의식 중에 요구받는다.

  이러한 일본적인 RPG의 모습에 대해 본토 미국의 게임 작자나 플레이어들이 일정한 비판을 하는 것 같다. 그것은 RPG 본래의 매력인 자유도를 떨어뜨린다는 의견이다. ‘일본의 RPG는 정해진 줄거리를 따라갈 뿐이다. 놀기 쉽고, 버그(프로그램상의 에러)도 적기 때문에 많은 고객을 끌어당길 수 있지만, 자기 스스로 줄거리를 만들어가는 RPG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편, 한국의 RPG는 인터넷 발달과 함께 나타난 MMORP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의 유행을 타고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지금은 이 분야에서 아시아의 리더격으로 성장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불특정 다수의 플레이어가 동시에 같은 게임을 진행하는 이 형식도 원래는 미국에서 탄생했다. 언제, 어떤 플레이어가 참가할지 모르는 인터넷의 특성은 실로 RPG의 원점인 자유로운 플레이어의 선택과 즉흥적으로 의외의 전개 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여기에도 어려운 문제가 숨어있다. 인터넷 세계의 자유는 익명의 자유이기도 하므로 규칙의 악용이나 도용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또한 다수의 플레이어가 제각각 갖고 있는 서로 다른 요구에 마스터인 컴퓨터가 어떻게 대응해갈 것인가 하는 질문에는 좀처럼 정답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질서 있는 게임 진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의 무법상태 같은 제멋대로의 플레이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자연히 이 장르에서는 게임 평가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경향을 보이기 쉽다. 또한 불특정 다수의 이용을 전제로 할 때, 요금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비즈니스 모델의 문제도 있다.

  한국에서는 고속 인터넷의 높은 보급률과 PC방이라는 인터넷게임에 맞는 오락실이 네트워크 발달이라는 유리한 조건 속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해결을 도모하며 거침없이 재미있는 RPG를 창출해내고 있는 것 같다. 이른바 흥이 많고 축제를 즐기는 국민성도 일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리니지, 아라드전기, 아틀란티카 등 연달아 대작을 제작, 게임을 운영하여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기업도 많다. 

  미국산 보드게임이던 RPG가 컴퓨터라는 매체를 거쳐,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다른 진화를 이룩하며, 비즈니스는 물론 오락으로서도 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또한 여기서 자연스러운 형태로 양국의 아이디어가 교류하고, 나아가 재미있는 게임 제작이 실현되고 있다. 최근 한국산 RPG 캐릭터의 디자인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많고, 반대로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인터넷 게임의 상당수가 한국의 게임운영회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게임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다양한 기술, 디자인, 아이디어가 복합해서 탄생되는, 젊은 세대의 발상이 교차되는 무대다. 앞으로도 때로는 경쟁자로서, 때로는 협력자로서 일한의 게임 디자이너가 세계에서 사랑 받는 독특하고 즐거운 게임을 만들어 나가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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