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대한민국일본국대사관 총무공사
스즈키 히로시(鈴木 浩)
1월말 총무공사로 서울에 부임했습니다. 부임하자마자 곧 나카소네(中曾根) 외무대신의 한국방문이 있었고, 또 한 달 후에는 이즈카(飯塚)씨 부자와 김현희씨의 면회가 성사되었습니다. 마치 모자간처럼 서로를 응시하는 고이치로(耕一朗)씨와 김현희씨의 모습에 눈물지으면서, 그 자리에 없는 친어머니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씨를 생각하며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4월에 들어선 지금, 북조선(북한)의 미사일발사 문제로 외교가 매우 분주해졌습니다. 부임 이후 8주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이 일본에게 얼마나 중요하며 신뢰할 수 있는 우방인가를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외근무로는 워싱턴, 로마, 테헤란의 3곳에 주재했었습니다.
워싱턴은 88년부터 90년까지, 무역마찰로 일미관계가 어렵던 시기였습니다. 그후 10년 가까이 도쿄(東京)의 외무성에서 남아시아, 미국, WTO, 서구 관련 업무에 종사하다가 이탈리아에는 정무 참사관으로 부임했습니다. 부임 2년째에 제노바 서밋이 있었고, 과격한 데모대에 사상 처음으로 사망자가 나오는 큰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서밋 후에 9. 11 테러가 발생. 문명 간의 대립이 부각되는 가운데, 이란 전근 명령을 받고 테헤란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새 아파트에 자리 잡을 겨를도 없이 갑자기 1달간의 카불 출장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질질 끄는 내전과 탈레반의 지배로 일본대사관은 몇 해나 폐쇄되었다가 도쿄에서의 아프가니스탄 부흥지원국제회의를 계기로 13년 만에 대사관을 재개하기로 한 것입니다. 전에 있던 대사관은 전란으로 무참히 파괴되고, 부지도 지뢰 위험이 있어 사용이 불가능했습니다. 임대 사무소는 둥근 무쇠난로를 피워도 외풍 때문에 추워 실내에서도 스키 점퍼를 입고 일을 했습니다. 물자가 부족하여 식사도 만족스럽지 못했으나, 3~4명의 관원들과 함께 미력하나마 아프가니스탄 재건에 온 힘을 쏟았던 나날이었습니다.
이처럼 북미, 유럽, 중동에서 근무했지만 아시아 근무 경험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아시아에서도 근무해보고 싶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자유, 민주주의, 기본인권, 법의 지배 등의 기본가치를 공유하며 중요한 이웃나라로서 많은 이해관계도 공유하는 한국에 주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도쿄에서 4년 반 있었기에 해외근무는 아직 멀었거니 했는데, 이번에 뜻밖에도 서울에 오게 되어 행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부임하기 전 서울에는 출장차 2번밖에 온 적이 없습니다. 맨 처음이 2006년 10월의 아베(安倍) 총리 방한 때로, 당시 나는 총리 관저에 파견을 나가 내각 부(副)공보관(관저의 외신담당 대변인)으로 아베 총리를 수행했었습니다.
베이징에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와의 회담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정부 전용기에 북조선(북한)이 핵실험을 했다는 제1보가 날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의연하게 한국에서의 행사를 예정대로 치뤘습니다. 한편 나는 숙소인 롯데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애틀랜타의 CNN과 런던 BBC로부터 몇 분후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뉴스 프로그램에 휴대전화를 통해 나와 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긴장감 속에서 일본정부의 입장을 세계에 알린 것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1년 전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 때로 후쿠다(福田) 총리를 수행하고 왔습니다. 그 때는 보스턴 연수 시절부터 20년 지기인 한국의 지식인들과도 만날 수 있어서 옛 정을 되살리며 한일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가족들은 아내도 중학교 1학년인 딸아이도 굉장한 ‘한류’ 팬이라 서울 부임 소식을 듣자 “야호!”를 외치며 야단법석이었습니다. 더구나 아내의 한국인 친구는 보스턴 유학 시절 고락을 함께 했던 둘도 없는 벗입니다.
지난주 딸아이가 일본에서의 학년을 마치고 제 엄마와 둘이서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아내는 새 아파트를 찾느라 연일 서울 시내를 종종걸음치고 있고, 딸아이는 인터내셔널 스쿨이 시작되자 금방 한국 친구가 생겼다며 환한 얼굴입니다.
이제 곧 일본에서 배로 부친 짐이 도착하고, 새 아파트로 이사도 하고, 학교에도 좀 더 친숙해지면 틀림없이 서울생활도 더욱 즐거워지겠지요. 아내나 딸이나 매운 음식을 아주 좋아해서 나만 고역입니다. 하여간에 한국음식이 참 맛있어서 세 사람 다 살이 찔까 봐 그게 걱정입니다. 게다가 나는 의사로부터 체질적으로 ‘술을 마시지 말라’는 엄명을 들은 터라 한국의 술문화 속에서 견뎌낼 수 있을지도 염려스럽습니다.
한국어의 습득도 큰 과제입니다. 총무공사는 업무의 성격상 대사관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고, 현지 직원도 일본어에 능통한 스태프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 때문에 출타할 때도 재류 일본인들과의 회합이 많은지라 업무상 한국어를 쓸 일이 거의 없고요. 게다가 올해 나이 48세, 뇌세포의 퇴화는 감출 길이 없어 좀처럼 단어가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아 곤혹스럽습니다.
한일양국은 월드컵 공동개최, 일본의 한류 열풍, 한국의 일본대중문화 개방 등의 덕택에 ‘가깝고도 먼 나라’에서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동시에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이나 피겨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한일 대결을 보노라면, 요미우리 자이언츠 대 한신 타이거스전과 같은 에너지를 느끼게 됩니다.
외교면에서는 셔틀 정상외교가 재개되어 궤도에 올랐습니다. 나날이 한일관계가 긴밀해지는 가운데, 미약하지만 나도 그 고리 속의 일부로서 함께 손잡고 걸어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