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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쿄, 그리고 두 시인
 
       
       
   

주한일본대사관 총괄공사
다카하시 레이이치로(高橋礼一郎)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 이상(李箱)이 1934년 당시의 서울 경성(京城)에서 발행한 신문에 발표했던 시입니다. 이 시로 시작되는 연작 <오감도(烏瞰圖)>는 그 난해함으로 인하여 독자들의 거센 비판을 불러 연재가 중단되고, 시인은 도쿄(東京)로 건너가 ‘사상불온'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건강 악화로 석방되나 그대로 간다(神田)의 병원에서 27세의 생을 마감합니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권위 있는 문학상이 존재할 정도로 그 전위성(前衛性)이나 짧은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대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공부가 부족한 나는 서울에 부임하기까지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정녕 알기 쉬운 시라고는 할 수 없으나, 맨 처음 읽었을 때 즉흥 재즈 연주를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좋은 리듬감과 도회인다운 수줍음이 아른거리는 표현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어두운 전쟁의 예감을 간직하면서도, 그러나 동시에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고 젊은 작가나 평론가들이 새로운 자기표현의 실험을 모색했던 시대의 그 공기가 이 시에 독특한 음영을 던지고 있습니다. 경성의 골목길을 질주하는 13명의 아해의 이미지와 ‘무섭다, 무서워하다'라는 말의 반복은 읽는 사람에게 불길하고 왠지 기분 나쁜 느낌을 안기지만, 이상은 곧바로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라며 마지막 절에서 그 이미지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성상의 테크닉으로도 보이지만, 작가는 이를 읽는 이에게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멋쩍은 듯이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 않습니까?
‘적당하오' ‘차라리나았소'와 같이 얼핏 보기에 툭 자르는 듯한 표현도 실은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감정 표현을 즐기지 않는 작가의 수줍은 성격의 발로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우연히 그림책 작가 미나미 쿠쿠(南控控)의 블로그에서 동시대의 일본시인 나카하라 츄야(中原中也)와 이상이 같은 1937년에 요절했음을 알았습니다. 츄야와 이상. 성장 과정은 크게 다르지만 도쿄와 경성이라는 두 도시의 길모퉁이에 선 젊은 두 시인이 길 가는 이들에게 던졌던 시선을 상상해보면 참 많이 닮았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것은 사람을 좋아하고 인생을 사랑하면서도 그 말을 입 밖에 낼라치면 왠지 좀 비틀린 듯 밀어내는 표현이 되어 버리고, 도회의 고독을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그곳을 가장 있기 편한 장소로 느끼고 마는 그런 젊은이의 모습입니다.



  아아, 열두시의 사이렌이다, 사이렌이다 사이렌이다

  줄줄줄줄 나오고 있어, 나오고 있어 나오고 있어



츄야가 <정오, 둥근 빌딩의 풍경>(주2)에서 노래한 일본 샐러리맨의 점심시간 풍경은 지금도 변함이 없거니와, 이 시는 나날의 단조로운 반복을 견디어내는 서민들을 야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원이 될 수 없는 자신의 고독과 허무를 유머로 포장해 넌지시 또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널리 약간 흐려, 약간 흐려, 먼지도 조금 일고 있다.

  이상한 눈길로 위를 올려보아도, 눈을 아래로 떨구어 보아도……

  그것은 벚꽃인가, 벚꽃인가 벚꽃인



단어의 반복과 거기서 빚어지는 독특한 리듬, 그리고 거기에 감도는 적요(寂寥)도 일한의 두 시인에게 공통적인 점입니다.
죽음과 파괴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덮어 버릴 시대적 예감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모더니즘 문화에 들뜬 도시에서 끝까지 새로운 자기표현 방식을 추구했던 그들의 인생이 같은 해에 종말을 맞이한 것을 생각하면, 이 두 사람이 혹시 도쿄의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만나 둘이서 둥근 빌딩을 올려다봤다면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이상의 대표작인 소설 <날개>에서는 주인공이 경성의 미쓰코시(三越) 백화점 옥상에서 잃었던 날개로 비상하는 꿈을 꿉니다. 나카하라 츄야는 비상하는 이상을 어떤 얼굴로 쳐다봤을까요?
그런 망상에서 깨어나 나는 2008년의 서울 혹은 도쿄로 돌아옵니다. 두 수도는 평화롭고, 젊은이들은 구김살 없이 여름을 즐기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상과 나카하라 츄야가 세상을 뜬 지 7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어느 나라의 어느 길모퉁이에도 그들과 같은 눈길을 지닌 젊은이가 아주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가령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작품이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번역되어 젊은 세대로부터 폭 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그 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계화가 국경을 없앤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고, 어떤 시대 어떤 상황 아래에서도 존재하는 마음의 본연에 걸린 문제입니다. 자유롭고 싶다. 독자적이고 싶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갈등들이 젊은이를 괴롭히지만, 동시에 참된 표현은 거기에서만 싹틉니다. 이상이나 츄야의 작품이 마음에 울림을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 누구나가 젊은 시절 경험했고,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밀어두었던 뭔가를 독특한 방식으로 되살려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주)
1. <이상문학전집: 시>, 이승훈 편, 문학사상사, 1989
2. <일본현대시감상>, 요시다 세이치(吉田精一) 저, 정승운 역, 보고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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