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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단상(斷想)-1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미치가미 히사시(道上尚史)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자락이 하얘졌다.’(《설국》)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마침내 아마기(天城) 고개에 다다랐다 싶을 무렵, 빗발이 빽빽한 삼나무 숲을 하얗게 물들이며 무서운 속도로 나를 뒤쫓아 왔다.’(《이즈의 무희(舞姬)》)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두 작품에 나오는 유명한 머리글이다. 마치 그 자리에 있는 듯한 느낌의 리듬감 있는 전개. 참신하고 인상적인 문체. 그야말로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일본어’다.

  ‘오랫동안 나는 내가 태어날 때의 광경을 본 적이 있노라고 우겼다. …어른들은 웃다가, 끝내는 자기를 놀리나 여겨 이 핏기 없고 애답지 않은 아이의 얼굴을 미움 어린 눈초리로 쳐다봤다.’(《가면의 고백》)
  ‘저 아가씨를 사랑하고, 그리고 버리자. 그런 승리가 어디 있겠는가!’(《푸른 시대》)
  --1969년 가와바타의 노벨상 수상 당시, 마찬가지로 수상자 물망에 올랐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이 다음에 일본인이 받는다면, 내가 아닌 오오에(大江)일 거라”고 단언했다. 일본의 전통미를 그린다는 점에서 가와바타와 특징이 겹치는 미시마 유키오, 그와는 극과 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미시마의 예언은 들어맞는다.

  화려한 문체, 그리고 상식을 뒤엎는 요란한 언동으로 화제를 일으켰던 미시마. 젊은 시절, 이미 이름난 작가였던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에게 대놓고 “난 당신의 문학이 싫소”라고 내뱉은 일화는 유명하다. 다자이도 한가락 하는지라, 미시마가 돌아간 뒤 “사실은 좋아하는 주제에”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동생 모두 도쿄대 출신의 국가공무원. 미시마 본인도 한때 대장성에 몸담았던 적이 있다. ‘아주 뛰어난 우등생으로 아무 힘 안 들이고 공부했습니다. 우등생도 숙제를 잊어버리거나 빼먹거나 하는데, 그는 없었어요.’ 중학부터 대학까지 동기 동창인 외무성의 대선배한테 들은 이야기다.
   ‘희망이란, 본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걷는 사람이 많다 보면 길이 생기는 것이다.’(루쉰의 《고향》)
  --《고향》은 일중 양국의 교과서에 실린 보기 드문 예다. 루쉰(魯迅)은 7년 반의 일본유학 동안, 일본과 서양의 작가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중국에서 젊은이를 대상으로 강연할 때, 나는 이 은근하면서도 용기 솟는 말을 인용했다. 편견과 격정이 아니라 작은 한 걸음이 무수히 쌓여 이웃 국민과의 상호이해가 구축된다. 희망의 유무를 논하기보다, 다함께 희망을 만들고 길을 만들어가는 거라고.

  ‘오오미야(大宮)님, 당신은 저를 취하는 것이 제일 자연스럽습니다.’(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実篤)의 《우정》)
   --18세의 스기코(杉子)가 대담한 편지를 사내에게 쓴다. 1919년, 졸부가 100엔(현 화폐가치로 20만엔 이상)짜리 지폐를 태워 불을 밝히고, 금니가 서민들에게도 유행하며, 물가가 4년 새 3배로 뛰었을 무렵의 작품이다. 1차 대전 후의 다이쇼(大正) 버블 경기(1919~1920). 그와 함께 러시아 혁명의 영향까지 더해져 지식인들은 사회 ‘개조’를 부르짖고, 무샤노코지는 ‘새로운 마을’ 건설로 이를 실천에 옮긴다. 일본 문학자들의 이상론(理想論)은 좌절되지만, 루쉰의 동생 저우쭤런(周作人)이 이를 중국에 소개하고, 마오쩌둥(毛澤東)은 인민공사의 최초의 발상을 여기서 얻었다고 전해진다.

  ‘겁 많은 자존심과 방자한 수치심’(나카지마 아쓰시(中島敦)의 《산월기》)
   --젊어서 수재로 이름 높고 시문으로 명성을 얻고자 하면서도, 상처 받기 쉬운 자존심 때문에 스승을 찾거나 친구와 어울려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것을 피했다.이 역설적인 글을 접한 나의 중국인 벗은 ‘일본문학은 1942년에 이미, 현대인의 고뇌의 본질을 이처럼 표현했단 말이냐!’며 놀랐다고 했다.

  ‘나는 싸우지 않는다. 죽이지 않는다. 돕지 않는다. …술책을 부리지 않는다. 아무 편도 들지 않는다. 그저 볼 뿐이다. 부들부들 떨고, 눈을 번뜩이며, 개처럼 죽는다.’(가이코 다케시(開高健)의 《빛나는 어둠》)   --가이코는 전쟁 중인 베트남에 갔다가 격렬한 전투와 고교생 처형 장면을 목격한다. ‘절대 평화’ ‘평화헌법을 세계로!’를 외치며 고도경제성장에 들떠 있던 일본. 터프한 작가도 그 간극에 압도되었을 게다. 정치적 색채의 작품은 아니지만, 위의 한 대목은 중립을 부르짖으며 팍팍한 현실에서 도피하던 그 당시 일본의(작가 스스로의) 모습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젊은 독자들은 멋진 진짜 미국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미국의 모습에 강하게 집착하고 소중한 것에는 전혀 무관심인 채, 이제는 일본의 중년이 되었다.’(가타오카 요시오(片岡義男))
  --영어에 의한 독서 체험이 거의 전부인 유행 작가의 통렬한 한 마디다.

‘소나기 온 뒤 채 마르지도 않은 나뭇잎 새로 물안개 피어나는 가을 저녁 어스름’(자쿠렌 법사(寂連法師))
   --일본인들에게 매우 널리 알려진 와카(和歌)로 ‘햐쿠닌잇슈(百人一首)’(주1)에도 들어 있다. 소나기가 지나간 후 운무 속에 잠긴 삼나무 숲. 자주 보는 풍경이요, 환상적인 정경이기도 하다.
  ‘햐쿠닌잇슈’는 에도(江戸) 시대 들어 ‘가루타토리(かるたとり)’(주2)로 부녀자와 아이 등 서민들과도 친숙해졌다. 공부와 인연이 먼 아이도 마음에 드는 시 몇 수쯤은 암송했다. 어느 나라나 엘리트층의 자녀교육은 있었지만, 수백년 전부터 일반 서민이 문화를 즐겼던 넓은 저변은 일본이 자랑해도 좋은 점이리라.

  ‘아무리 기를 쓰고 죽게 일 해도 우리네 살림 여전히 필 날 없어 가만 손을 쳐다본다’
  ‘장난삼아서 어머닐 등에 업고 하도 가벼워 애처로움에 울다 세 걸음도 못 뗀다’
  ‘사뭇 비범한 사람인 양 처신한 뒤의 그 쓸쓸함은 무엇에다 비하랴’(이상은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1987년, 미국에서 유엔 주재 한국대사와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눴을 때다. 대사가 갑자기 일본어로 이 ‘가만 손을 쳐다본다’란 구절을 언급하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본인의 미학을 칭찬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정감을 물씬 표현하는 아름다운 언어의 와카는 많지만, 다쿠보쿠에게는 현대인으로서도 공감을 느낀다.

  13세기의 설화집 《우지슈이모노가타리(宇治拾遺物語)》 중 불화를 그리는 화가 ‘료슈(良秀)’의 이야기다.
   --이웃집에서 불이 났다. 자기 집에 불이 번져 활활 타는 데도 화가는 그럴 수도 있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이따금 웃고 있다. 미친 것 아니냐고 곁에서 묻는다. 그러자 “좋았어, 좋아. 지금까지 부동명왕(不動明王)의 화염을 잘 못 그렸는데, 이제 알았소. 불꽃과 연기는 저리 타오른다는 걸!”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후세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긴다. 기량의 극치를 이루려는 집념이 예사롭지 않다. 이런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있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나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외에도 일본문학은 참으로 다채롭다. 문학이 젊은이의 훈장이던 시대는 끝났지만, 지금도 일본인은 전철 속에서 열심히 문학서적을 읽고 어린이들은 ‘햐쿠닌잇슈’에 흥겨워한다. 문학을 통해 역사나 문화나 사회를 잘 헤아릴 수 있으며, 무엇보다 사람(人間)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주)
  1. 햐쿠닌잇슈(百人一首): 가인(歌人) 백 명의 대표적 와카(和歌) 한 수씩을 모은 것이 며, 와카란 5・7・5・7・7의 5구 31음으로 된 일본 고유의 짧은 시 형식이다.
  2. 가루타토리(かるたとり): 일본 전통의 카드놀이. ‘햐쿠닌 잇슈’를 이용한 가루타는 ‘와카’ 한 수를 두 장의 패에 상구(上句: 5・7・5)와 하구(下句: 7・7)로 나누어 적 은 뒤, ‘하구’ 쪽은 바닥에 깐다. 그리고 한 사람이 ‘상구’를 읽으면, 그에 맞는 패 를 가장 빨리 많이 찾아내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다. (번역: 김경희 번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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