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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미치가미 히사시(道上尚史)
일본은 지금도 계절에 따른 세시풍속(歲時風俗)이 생활 속에 짙게 남아 있다. 집집마다 찬합에 담아두고 먹는 설음식 ‘오세치료리(おせち料理)’에는 일본어 발음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다. 경사롭다는 뜻의 ‘메데타이(めでたい)’에서 유래한 ‘타이(도미)’. 기뻐하다 ‘요로코부(喜ぶ)’의 ‘코부(다시마)’. ‘마메니(まめに)’ 곧 건강하고 부지런하게 살라는 ‘마메(콩)’ 등.
이 밖에 송송 뚫린 구멍을 통해 앞날을 보는 눈이 밝아지기를 바라며 ‘연근’을, 헤아릴 수없이 많은 알처럼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며 말린 청어알 ‘가즈노코(数の子)’를 먹는다. 또 다시마말이인 ‘콤부마키’나 계란말이 ‘다테마키’는 두루마리 책인 ‘마키모노(巻物)’와 통하며 학업 성취의 기원을 담고 있기도 하다.
내가 처음 온 1984년 이후 한국은 사회도 패션도 눈부시게 변했지만, 말에도 변화가 있었던 듯싶다. 먹거리 등의 ‘물건’에 경어를 붙이는 음식점이 많아졌다.
“피자 나오셨습니다.”
“화장실이요? 나가서 오른쪽에 있으세요.”
좋게 보면, 손님에 대한 존경의 뜻일 거라는 심리 분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 사람에게 물어봐도 역시 잘못된 표현이라는 분들이 많다. ‘일본사람이 뭐라는 거야? 다들 그렇게 말하잖아. 뭐가 문젠데!’ 하는 표정을 짓는 젊은이도 간혹 있지만 말이다.
오래 전, 처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다. 어떤 경우에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경어법이 뚜렷이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회사원이라고 치자. 외부에서 “사장님, 계십니까?”란 전화가 걸려왔을 때,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한국은 “사장님, 안 계십니다(社長さまはいらっしゃいません)”가 정답이다. 그러나 일본어로는 안 될 말이다. ‘이런 몰상식한 사람 봤나!’ 하고 웃음거리가 된다.
사장과 나 두 사람 사이에는 물론 공대를 해야 하지만, 회사 밖의 사람에 대해서는 사장도 나도 ‘한 식구’로서 낮출 필요가 있다. 사장에 대한 존경심을 외부 사람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 안팎의 구별이 우선이다. 그래서 “사장, 없습니다(社長はおりません)”가 정답이다.
한편, 한국에서는 상대를 불문하고(외부인에게도) 사장에 대한 경의를 그대로 표하는 것이 예의에 맞는다.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으며, 한국은 절대 경어, 일본은 상대 경어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아니, 본래는 한국도 그렇게(일본처럼) 말하는 것이 올바른 어법이라고 생각한다.”는 분도 가끔 계신다. 과연 어떤지, 독자 여러분의 가르침을 청한다.
일본 편의점이나 체인 음식점에서도 거슬리는, 아니 틀렸다고 해야 할 말투들을 쓰고 있다.
“千円からお預かりします(천원부터 받았습니다)”
“はい、アメリカンコーヒーになります(네, 아메리칸 커피가 되겠습니다)”
900엔도 5000엔도 아닌 1000엔을 받았다는 점원의 심리겠지만, 아무튼 조사를 붙일 양이면 ‘から(부터)’가 아닌 ‘を(을)’여야 한다.
‘になります(되겠습니다)’도 ‘です(입니다)’라는 직설적인 말투를 누그러뜨릴 생각이겠지만, 이 역시 잘못이다. 업무 지침대로 아무 의문 없이 앵무새처럼 이상한 일본어를 되뇌는 젊은이에게 한 마디 비꼬고 싶어진다. “커피가 된다니? 흠, 그럼 커피가 되기 전엔 뭐였는데. 그 다음엔 또 뭐가 되는 거고!?”라고. 내게 그런 용기는 없지만 말이다.
도쿄의 지하철에서 젊은 샐러리맨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あの先輩、最近ちょっとおかしいよね。なんだかやり投げだよ(그 선배, 요즘 좀 이상하지? 왠지 투창(?)이야.)” “そう、そう(그래, 그래)”――세상에는 믿기어려운 말실수도 있는 법. ‘投げやり(나게야리)’와 ‘やり投げ(야리나게)’는 영 다르다. 전자는 ‘될 대로 되라’며 포기하는 식의 태도이고, 후자는 육상경기 종목인 ‘투창’이다. 참고로 ‘投げやり’의 ‘やり’는 원래 동사 ‘遣る(야루)’에서 온 것이며, 던지는 창 ‘야리(槍)’가 아니다.
한국은 전화 안내 등에서 대뜸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하는데, 이 말을 들으면 문법상 별 잘못은 없음에도 쉰 세대인 나는 왠지 편치가 않다. 가슴 설렐 만큼 순정파도 아니건만, “난 댁을 몰라요” 혹은 “나도요”라고 대꾸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사랑한다’의 용법은 지난 4반세기 동안 많이 변화한 것 같다. 80년대, 영화 등에 나오는 ‘I love you’란 영어 표현에 일본인과 한국인은 ‘우린, 그런 말은 쑥스러워서 못해’라고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허나 지금 한국에서는 젊은 연인뿐 아니라 부모자식이나 부부끼리도 ‘사랑해!’란 말을 심심찮게 하는 모양이다.
80년대에는 길거리나 버스 속에서 모르는 젊은 여성을 ‘아가씨’ 하고 불렀다. 요즘은 그리 보기 드문 광경이다. 부언하자면, 남자 어르신이 ‘어이, 처녀’라고 부르는 것도 여러 번 들었다. 젊은 여선생님이 “처녀라니, 어째서 그런 의학적 용어를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하는지 몰라, 참” 하고 얼굴을 붉히며 불만스레 얘기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도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호칭이었던가 보다. 지금은 물론이고…….
또 전에는 아주 젊지 않은 음식점 여종업원의 경우 ‘아줌마’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이모’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도 그렇지만, ‘아줌마(おばさん)’란 호칭을 싫어하는 여성들이 늘면서 친근감이 드는 ‘이모’라고 부르는 걸까. ‘고모’가 아닌 점도 흥미롭다. 어쩐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끝으로 한 가지 더, 한자 이야기. 대학생이나 초중고생은 어릴 적부터 한자를 배웠다. 그런데 30세 이상의 한국인 중에는 구미에서 석사・박사를 딴 사람도 ‘어라!’ 싶을 정도로 한자를 못 읽고 못 쓰는 이들이 있다. 국제화 시대를 말하려면, 외국과의 소통이나 일한중의 관계강화를 논하려면, 또 일한중의 눈부신 관광객 증가를 감안한다면, 한국인의 한자 능력을 좀 더 향상시키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영어 공부시간을 백으로 치면, 동양문화의 기반인 한자 공부를 3~5쯤 한다 해도 손해는 없을 것이다.
말은 살아 있는 생물과 같아서, 본래는 잘못된 표현이던 것이 생활에 정착해 표준 용례가 된 경우도 있다. 나이든 사람의 도덕론이나 연구자의 논리가 늘 우선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말이란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니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하는 감각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번역: 김경희 번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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