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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미치가미 히사시(道上尚史)
서울 유학생활은 행복했다. 감기로 쉰 날, 친구가 하숙집으로 전화를 걸어 왔다.
“미치가미 상, 무슨 일 있어? 교수님이 ‘미치가미 씨, 애인한테 차여 충격으로 수업 빠진 거 아니냐!’면서 걱정하셨어. ㅎㅎ~”
농담이었다. 하지만, 1985년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과 지도교수님이 한 외국인 유학생이 결석한 것을 알고 염려해주신 것만은 사실이다.
같은 집 하숙생들은 모두 나보다 몇 살씩 어린 한국 학생들. 나를 ‘형’이라 부르는 그들과 탁구를 치거나 설악산에 등산을 가기도 했다. 때때로 하숙집에는 데모 진압대가 쏜 최루탄 가스가 감돌았다. 연구실 친구들은 저녁식사 자리에 저마다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다. 동시대의 정치와 데모, 눈앞에 다가오는 군대문제, 그리고 학업. 이 세 틈바구니에 끼어 저마다 청춘의 고뇌를 토로하는 그들이 (여친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내게는 눈부셨다. 나중에 국무총리가 되신 노재봉 교수님을 모신 술자리에서도 ‘선생님,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라며 적극적이었다. 내게 전화를 걸었던 학생, 교수님께 과감히 질문하던 학생. 지금은 둘 다 서울의 명문대 교수다.
그 후 1년 동안 미국에 유학을 갔었는데, 빗자루로 쓸어다 버릴 만큼 외국인 유학생이 흔했고, 학교를 빠져도 전화가 걸려오는 일은 없었다. 서울처럼 짙은 정을 나누는 교류는 없이 담담하게 공부만 하는 나날이었다. 하버드대학의 아시아인 유학생으로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많았으며, 대만인 외에 중국인은 드물었다.
자국의 잣대가 통하지 않아 언짢은 적도 많다. 국내에서는 우등생이라도 외국에선 초라한 성적일 수도 있다. 언어가 자유롭지 못해 매일 크고 작은 창피를 당한다. 허나 바로 그 점에 유학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계의 앞선 제도와 문물을 접하고, 나라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외국의 사정을 피부로 느끼고 파악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정치가, 예술가, 문학자, 관료, 군인, 비즈니스맨 중에는 유학생 출신이 많다.
인도의 간디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영국에, 이승만 대통령과 도산 안창호는 미국에 유학했다. 모차르트는 유학 정도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각국을 돌아다니며 음악을 흡수했다. 셰익스피어 작품 속에서 덴마크 왕자 햄릿이 부친의 죽음을 알게 되는 것도 유학을 가 있던 독일이었다. 일본도 예로부터 중국에 ‘견당사(遣唐使)’ 등을, 메이지(明治) 이후는 서양 여러 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정치, 법률, 문화, 기술의 기반을 구축했다.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는 유학한 중국에서 당 현종을 섬기며 벼슬을 거듭했고, 이백과 왕유가 그의 인품을 칭송하는 시를 남겼다. 9세기 일본의 고승 엔닌(円仁)은 중국에 건너가 온 계층의 사람들과 교제했다. 유학 겸 무사 수행을 위해 갔던 것으로 먼저 중국에 와 있던 한국인 승려의 지원도 받았다. 11세기의 ‘하마마쓰추나곤 모노가타리(浜松中納言物語)’는 중국에 유학한 귀족의 국제연애소설이다. ‘일본과 달리 중국 여성은 (교제를 청하는 남자에게) 좋고 싫음을 또렷하게 말하므로 알기 쉽다’는 등 현대에도 통하는 구절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의 인물에는 일본 유학파가 대단히 많다. 2007년 중국의 원자바우(溫家寶) 총리가 일본 국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중국 민주주의 혁명의 선구자이신 쑨원(孫文) 선생의 혁명 활동은 많은 일본인 벗의 지지와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선생, 루쉰(魯迅) 선생, 궈모뤄(郭沫若) 선생 등의 선각자들도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일본 국민과 깊은 우정을 맺었습니다.’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인 루쉰은 7년 반 동안 일본에 체재해 일본어가 매우 유창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일본인과 같은 스타일로 생활하려 했다. 일본 옷 와후쿠(和服)와 하카마(袴) 차림에 게타(下駄)를 신고 야시장 구경을 다니기도 했다. '후지노(藤野) 선생'은 도호쿠대학(東北大学) 의학부 시절의 은사에 관한 작품이다.
후지노 선생에게 제출했다 돌려받은 필기 노트를 펼치던 루쉰이 놀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와 동시에 일종의 곤혹스러움과 감격에 휩싸였다. 내 노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붉은 글씨로 첨삭이 되어 있었는데, 숱하게 빠진 곳에 대한 가필뿐만 아니라 문법의 잘못까지 죄다 바로잡아 주셨다. …그는 나를 가장 감격케 하고, 가장 격려해준 한 분이다.’
후지노 선생의 사진은 지금도 벽에 걸려 있다. 선생의 얼굴에 눈을 돌릴 때마다 ‘양심을 일깨우고, 그리고 용기를 북돋아준다.’
세계의 과학, 사상, 정치, 문학을 일본에서 널리 흡수한 것이 루쉰의 활약 기반이 되었다. 그는 메이지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팬으로, 소세키의 예전 집에서 유학생 친구와 함께 살았다. 소세키도 런던 유학시절의 은사 이야기를 <클레이그 선생>이란 제목으로 작품화했다. 베이징 루쉰 박물관에는 그의 절필로 일컬어지는 메모가 있다. 일본 의사한테 쓴 일본어 메모가 당당히 전시되어 있다.
루쉰과 대비해 떠오르는 사람은 이광수로서 그도 일본 유학생이다. 젊었을 적 그의 작품은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훗날 ‘친일파’란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 <무정>은 한국 근대문학의 효시로 젊은 시절 김일성은 만주에서 이광수의 <개척자>를 애독했다고 한다.
20세기 초엽, 도쿄에는 1만 명이나 되는 중국 유학생이 있었다. ‘중국혁명동맹회’는 1905년 도쿄에서 결성되었다. 중국공산당 창당의 두 지도자인 천두슈(陳獨秀)와 리다지오(李大釗)는 모두 일본 유학생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일본에 1년 반 체류했다. 학업의 진척이 더딘 것을 탄식하는(세 학교에 불합격) 한편으로 도쿄의 이곳저곳을 걸어 다닌 모습을 일기에서 엿볼 수 있다. 그가 교토 아라시야마(京都嵐山)의 풍경에 감탄해 쓴 시구(詩句)는 유명하다. 마오쩌둥도 일본유학을 희망해 초보 일본어를 배웠다고 일본 정치인에게 말했다. 나는 일본을 향해 떠나는 중국 학생들에게 “21세기의 루쉰, 저우언라이가 되라!”는 격려사를 한 적이 있다.
제 눈에는 자기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거울이나 카메라 등 도구가 필요하다. 밖에 나감으로써 비로소 자국의 문제점이 보인다. 국내의 감각, 상식으로는 비즈니스가 잘 굴러가지 않는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오는 사람은 내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늘었다. 하지만 외국에 대한 동경심이나 유학 열기가 약해진 것은 최근 일본의 근본 문제다.
일본은 환경문제와 저출산・고령화 등 복지문제에 대해 아시아에서 가장 일찍 대처해오고 있어 앞으로도 참고가 될 것이다. 도쿄를 비롯한 대부분 지역에서의 생활도 대학 수업도 지진 전과 다름없이 순조롭게 영위되고 있다. 학문 지도는 엄격해도 매력 있는 문화나 생활을 즐길 수 있다. 일본에 유학을 많이 와주시면 감사하겠다.
(번역: 김경희 번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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