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미치가미 히사시(道上尚史)
베이징 올림픽을 사이에 둔 2007∼9년, 나는 베이징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했다. 쓰촨성 대지진을 극복하고, 올림픽은 성공했다. 격차, 인권, 환경, 부패, 농촌문제, 티베트를 비롯한 민족문제 등 중국은 많은 모순과 과제를 안고 있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동시에, 확실히 힘차게 전진하는 힘은 있었다.
1921년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중국공산당 성립)
1979년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개혁·개방정책 시작)
1991년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다(소련 등 구(舊)공산권 붕괴)
2008년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다(‘리먼 쇼크’ 후의 세계경제)
- 중국 인터넷에 등장한 짤막한 정치 풍자의 명작이다. 중국은 줄곧 누군가에게 의존하며 구원받아 왔지만, 이제는 중국이 세계를 구하게 되었다는 자신감과 높은 기개가 잘 나타나 있다.
일본은 1964년 도쿄 올림픽, 한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중국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경제·사회의 발전단계와 올림픽 개최시기에는 상관관계가 있는 듯하다.
2007년 11월, 중국 월간지에 “베이징 올림픽의 주인공은 누구인가?”라는 칼럼이 실렸다.
‘국제사회가 개최국에 주목하는 것은 금메달 수가 아니다. 올림픽의 주인공은 각국 선수이지 중국이 아니다. 강한 자국 선수에만 열광하는 중국인지, 외국선수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공감할 수 있는 중국인지 지켜보고 있다. 이들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국의
역할이며, 그렇지 못하면 메달 수가 많아도 중국에 대한 세계의 평가에 흠집이 날지도 모른다.’
‘사람도 국가도 성장함에 따라 변화해간다. 자동차와 공장의 증가, 콤플렉스에 바탕을 둔 저돌적이고 맹렬한 돌진에서 균형 잡힌 종합발전의 중요성에 눈뜨는 시기다. 서울올림픽 당시 한국은 이를 알고 있었다.’
다소 비판적인 기고문이었지만, 올림픽이 끝난 후 “미치가미 공사의 그 글은 베이징시 간부들도 주목하고 참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베이징에 부임하기 전부터 나는 신문, TV, 서적 등을 통해 중국 정보를 접했었다. 중국인의 일본관은 극히 엄격하고 비판적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 중국에 살면서 의외의 면을 발견했다.
‘공항과 지하철을 비롯한 베이징의 기반시설은 일본의 지원으로 건설된 것이 많다. 철저한 일본제품 배척주의자는 베이징에 와서는 물도 마시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본인의 인사성에 무척 감동 받았다. 사람과 부딪쳤을 때 나도 미안하다고 했지만, 상대방은 더 깊이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일본의 도로는 깨끗하고, 에스컬레이터도 나란히 두 줄로 탄다. 왜 “예의지국”이란 중국에서 기본 매너를 지키지 않는가. 우리는 왜 못 하는가.’‘일본인을 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수준이 낮음을 나타낸다.’
- 이상은 일본에 수학여행을 다녀온 고교생들의 감상문이다.
‘중국은 G2니 하며 우쭐대서는 안 된다. 덩치는 커도 중간 이하의 개도국이다.’ ‘과격한 의견을 토로하기는 쉽다. 생각도 분별도 없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을 비난만 한다. 편협하고 과격한 민족주의는 세계의 조류나 역사적 진실에 반하며, 민족의 근본이익에 손해다.’ ‘일본은 많은 면에서 매우 발전한 나라로, 국가 이미지가 세계 최고다. 중국은 덩치만 커졌을 뿐 강한 나라가 아니다. 많은 병적 요인을 안고 있다.’
- 이상은 신문기사다.
자국 중심에 배타적인 발상으로 치닫기 쉬운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이를 견제하고 계몽하는 현명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이 양쪽의 균형에 중국 발전의 비밀이 있고, 또 위태로움도 있다고 생각한다.
‘세 나라의 국민성을 비교해 달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국민성이란 자칫 위험한 개념으로 편견이나 일방적 몰아붙이기로 연결되기 쉽다. 일반적인 이미지와 실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일본과 중국은 크게 다
르며, 한국은 그 중간 정도’라는 견해도 맞지 않는다고 본다. 일한중 세 나라 사람이 함께 식사를 했을 때의 일이다. 한국인이 “일본인의 ‘검토하겠다’는 대답을 ‘예스’로 생각했더니 틀렸다. ‘노’이면, 그렇게 말해 주면 좋을 텐데”라고 말했다. 그러자 중국인이 “나는 일본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그것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초면인 사람한테 딱 부러지게 ‘노’라고 말하는 결례를 피하느라 중국은 ‘연구하겠다’고 한다”는 설명이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금메달 순위 1위였다. 연일 자국 선수의 활약상을 보도했으나, 종반에 이르러 자만심을 경계하는 논조로 바뀌었다. 자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음 기사에는 놀랐다.
‘다이빙, 탁구, 배드민턴, 양궁. 우리가 금메달을 딴 것은 세계적으로 비인기 종목이다. 금메달이 많다 해도 진정한 스포츠 대국이 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를 사랑하는 넓은 저변이 중국에는 아직 없다.’
중국의 젊은이들 가운데 일본문화 팬이 많다는 말은 들었지만, 각 대학에서는 일본문화를 중심으로 한 행사를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실시하는 곳이 많았다. 상징적인 것이 대표적 명문교로 5·4운동 등 민족운동의 전통도
있는 베이징대학이다. 학생(일본어학과가 아닌 사람도 다수)들이 노래, 기모노 공연과 꽃꽂이, 스포츠, 강연회 등 참 다양한 행사를 실시했다. 일중의 정치문제로 몇 해 동안 공백이 있었음에도, 학생들이 조직을 만들고 대학당국을 설득하고 일본대사관이나 협찬기업과의 교섭 등을 진행하는 그 열의와 추진력에 놀랐다.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11년 만에 근무하는 한국은 어떤가. 눈부신 발전으로 자신감이 붙은 한국. 비즈니스나 교육에서의 한국의 왕성한 해외진출 열기는 한 일본인으로서 부러울 정도다.
‘한국의 유방암 수술 성공률은 87%. 미국의 86%를 웃돕니다. 일본은 84∼5%입니다.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는 70%대거나 그 이하로서, 옛날 우리나라 수준입니다.’
-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다. 의학자의 침착한 말투 속에도 급성장에 대한 자긍심이 엿보였다. 통계 수치가 정확한 한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럼 다음 이야기는 어떤가.
‘옛날 우리 미술계는 프랑스나 일본의 전문잡지, 개인 전집을 사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렇지만 요즘은 외국 것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것이 가장 좋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 한국의 미술계 간부의 이 말에 일본 원로 문화인도 나도 고개를 갸웃했다.
1984년 서울대학에서 들은 노(老)교수님의 강의가 생각난다. ‘우리는 일본을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우리는 일본을 모른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던…
4반세기가 지나, 서울대학에 일본학 전공학과가 개설될 전망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한 신문 칼럼은 이를 지지하면서 ‘한국은 일본을 아는 것 같아도 실은 모른다’고 썼다. 한국은 풍요로워져도 겸손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에 1인당 GDP에서 미국을 제치고, 원조액도 세계 제일이 되었다. 당시 미국은 ‘냉전에서 소련을 이겼지만, 진정한 승자는 일본’이라고 했다. 이에 일본은 ‘Japan is No.1’이라며 우쭐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독선과 겸손, 폐쇄와 개방. 어느 나라에나 양면이 있다. 이를 알고 있는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사람이나 국가나 열심히 외부로부터 배울 때는 뻗어나가고, 오만해지면 진보하던
발걸음이 멈추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번역 : 김경희 번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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