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미치가미 히사시(道上尚史)
한국에 돌아왔다. 안국동 길을 걸으며, 13년 전에도 27년 전에도 내가 이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 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인가 아닌가. 눈앞을 지나가는 학생이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 묘한 기분이다. 지하철 2호선을 타자 기억이 되살아났다. “신문 100원이요!”라고 외치는 소년한테 자주 신문을 샀다. 신촌에서 “가방 좀 봅시다.” 하면서 내 가방을 점검
하던 젊은이. 그들은 모두 잘 있을까. 아니, 발전하는 한국은 바쁘다. 외국인의 감상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중국 공사 다음에 한국 공사가 된 일본 외교관은 처음 아닌가. 일본이 한국을 중시하는 거지요.”라는 말을 들었다. 나 자신의 인사 배경은 모르지만, 한국에서 다시 근무하게 되어 무척 기쁘다. ‘한류’ 팬인 아내도 기뻐하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 때 수많은 분들이 베풀어 주신 정과 지원에 마음으로부터 감사 드린다. 2008년 쓰촨성(四川省)지진 당시 나는 베이징에서 근무했었다. 천재(天災)
는, 자연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인간의 작고 무력함을 잔혹하리만큼 보여준다. 그러나 때로는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곤궁 속의 사회질서, 자기를
희생하며 외국인 노동자들을 먼저 대피시킨 회사 간부, 나라의 벽을 초월한 지원…….
지난번에는 정치부, 이번에는 공보문화를 담당한다. 선인이 이르되, “양국관계를 규정하는 최대 요인은 무엇인가? 몇 달만 보면 정치, 몇 년이면 경제, 하지만 50
~100년이면 문화다.”라고 했다. 정치 현안으로 갈등이 고조되었다 해도, 좀 길게 보면 경제가 관계를 지탱한다. 외국제품을 매일 쓰고, 먹고, 타기도 한다. 국산품 중에도 외국 부품이 꽤 많이 들어 있다. 더 장기적으로는 문화ー음악, 문학뿐만 아니라 나라의 매력, 친근감, 품위 등이 종합 평가된다.
15년 전, “한국 영화는 재미있어요, 가수도 좋고요.”라고 말해도 일본사람들은 귀도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과 무관한 사람들이 한국 연예계를 나보다 잘 안다. 말로는 “잘 됐다, 다행이다”라고 하지만, 나만의 보석상자가 남들에게 알려진 아쉬움도 없진 않다.
앞으로 여러분의 지도와 지원을 받으며 일한상호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힘쓰고자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적인 풀뿌리 교류인 9월 25일 ‘한일축제한마당’에 참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略 歴]
성 명 : 道上 尚史(미치가미 히사시)
생년월일 : 1958년
출신지 : 大阪(오사카)
주요경력 : 1983 도쿄대학(東京大学) 법학부 졸업
1984~6 서울대학 외교학과 석사과정 특별연구생
1987 하버드대학 석사(동아시아 국제관계)
1987~9 외무성 북동아시아과, 주제네바대표부(WTO) 등 근무
1998~2000 주한일본대사관 참사관
2003~4 외무성 경제국 경제2과장, 내각부 참사관
2007~9 주중일본대사관 공사
2011. 7 주한일본대사관 공사, 공보문화원장
저 서 : 〈한국을 모르는 한국인, 일본을 모르는 일본인〉
〈일본외교관, 한국 분투기〉
〈외교관이 본 중국인의 대일관(對日觀)〉 외
다수의 발표논문 및 기고문
●서울대학, 조치대학(上智大学), 게이오대학(慶應大学) 등에서 일본
외교 연속 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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