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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를 생각하며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다카하시 다에코(髙橋妙子)

  4월 11일, 서울 교외의 망우리 공원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묘소에 다녀왔습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본 야마나시현(山梨県) 출신으로 1914년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 임업기사로 건너와 한반도의 풍토에 맞는 육묘법(育苗法)을 개발하는 등 조림・녹화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당시 경성에서 소학교 교사로 있던 친형 노리타카(伯教)와 함께 조선의 도자기와 목공품 등의 민예 속에서 조선민족문화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일본에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사람과 조선 문화를 더없이 사랑한 다쿠미는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본인의 뜻에 따라 한국식으로 조선 땅에 안장되었으며, 이 때 조의를 표하기 위해 서로 관을 운구하겠다는 조선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한국 분들이 다쿠미의 묘를 돌봐오다가, 십여년 전부터는 기일인 4월 2일을 전후하여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참고로 그의 형 노리타카는 1946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전부터 나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실제로 묘소를 참배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에 앞서 우연히도 아사카와 다쿠미에 대해 몇 차례 생각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지난 3월 어느 날, 야마나시현의회 대표단이 공보문화원을 방문하여 아사카와 다쿠미의 인간 됨됨이와 업적을 그린 에미야 다카유키(江宮隆之)의 소설 <백자의 사람(白磁の人)>을 일한 공동으로 영화화할 구상이 실현 단계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전 임지인 미얀마에서도 일본과의 인연을 그린 소설을 영화화할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현까지는 10년 이상을 요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프로덕션의 관여 없이 진행하기란 제작비 조달을 비롯하여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백자의 사람>에 거는 일한양국 관계자의 열의와 고초가 어느 정도일지 능히 짐작되는 터라, 나도 아사카와 다쿠미에 대해 공부를 좀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 차에, 지난달 새소식 칼럼에서 소개한 다회 때 이춘실 선생이 사용했던 물항아리가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한국에선 흔히 ‘달항아리’로 부르는 이 항아리는, 그 빛깔과 자태에서 일본 백자에는 없는 특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차가운 흰색이 아니라, 웅숭깊은 따뜻함을 간직한 속살과 독특한 곡선에서 아사카와 다쿠미와 그의 형 노리타카의 마음을 끌어당긴 게 바로 저것이었으리라는 확신 비슷한 것을 느끼는 순간 두 형제에 대한 친근감이 솟았습니다.
  다쿠미는 임업시험소 일로 각지를 돌아다니는 가운데 조선의 가마터를 찾아내어 복원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다쿠미 사후에 그의 유고(遺稿)를 펴낸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는 지금도 학술적 가치가 높은 저서라고 합니다. 다쿠미는 또, 총독부가 추진하는 일본화 정책 속에서 사라져가는 조선 문화를 안타까워하며 각지에서 조선 민예품을 수집했습니다. 특히 조선의 소반에 큰 관심을 보여, ‘올바른 공예품’의 진위 감별은 사용할수록 더 좋아지는가 나빠지는가로 판가름난다면서 이를 대표적인 ‘올바른 공예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조선의 소반(朝鮮の膳)>을 저술했습니다.
  최근 내가 아사카와 다쿠미에 대해 관심을 가진 또 하나의 이유는, 지난달 한국인 벗의 소개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의 아내 가네코(兼子)의 생애를 그린 다고 기치로(多胡吉郞)의 소설 <야나기 가네코 조선을 노래하다(私の歌を、あなたに-柳兼子、絶唱の朝鮮)>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민예운동을 주도한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에서도 매우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도쿄음악학교(현 도쿄예술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한 성악가로 당시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와 친교가 있던 남편 무네요시의 제안에 따라 일본인 최초로 조선에서 독창회를 열었던 사람이란 사실은 책을 읽고서야 알았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무네요시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탄압을 받아 많은 희생자가 나온 사실에 분개하여 두 개의 글을 발표했습니다. 하나는 당시 조선에서의 일본 식민지정책의 실상을 비판한 ‘조선인을 생각한다’이고, 또 하나는 아사카와 형제의 안내로 방문했던 조선에서 발견한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였습니다. 그리하여 3.1독립운동의 탄압으로 짓눌린 조선의 이웃들을 위해 가네코의 독창회를 조선에서 열자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음악회는 어떤 방식으로 추진하는가에 따라, 그야말로 조선의 이웃들로부터도 총독부의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네요시의 조선 문화에 대한 깊은 동경과 조선의 이웃들에 대한 강한 애정, 그리고 가네코의 예술성 높은 가창력을 잘 알고 있던 조선인 벗 남궁벽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창간된 지 얼마 안 되는 ‘동아일보’ 주최의 제1회 문화사업으로 개최되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소설은 1914년 9월 어느 날, 일면식도 없는 노리타카가 조선 백자를 선물로 들고 무네요시를 찾아오는 장면(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이 무네요시에게 조각 작품을 보낸 것을 안 노리타카가 그것을 보려고 경성에서 일부러 일본 치바현(千葉県)까지 찾아옴)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다쿠미와도 친교를 다지게 되고, 마침내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의 설립을 구상하기에 이르는 과정 등을 차분히 기술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일본에서 하마다 쇼지(浜田庄司) 등과 민예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1926년이니까 무네요시와 다쿠미의 만남이 없었다면 민예운동도 없었을까요? 내 고향집은 도예가 하마다 쇼지에 의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마시코야키(益子焼き)’ 도자기 마을과 가까운 곳이거니와, 그들의 만남이 없었다면 마시코야키도 유명해지지 못했겠지요? 아무튼 <야나기 가네코 조선을 노래하다>라는 한글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을 관심 있는 분들은 부디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소 참배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그 날은 참말이지 화창한 봄 날씨였습니다. 망우리는 봄꽃들로 넘쳤고, 백자 항아리를 형상화한 다쿠미의 묘비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도가 권영석 씨의 헌차(獻茶)가 있은 후, 참가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묘소에 헌화하며 다쿠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묘비 옆에는 한국 임업시험장 직원들이 건립한 추모비가 서 있고, 비문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전후 오랜 세월 다쿠미의 묘소를 보살펴온 것은 바로 이들 임업시험장 분들이었습니다.
  즉, 전후 일본과 일본인에 관련된 거의 모든 것들을 지워 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다쿠미의 묘만은 끝까지 건사해온 것입니다. 17년간 조선에 살면서,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해 헌신한 그를 아는 분들에 의해서…. 그 후로도 임업시험장 관계자 개인 명의로 서울특별시 장묘사무소에서 장묘시설사용허가증을 받아 묘적(墓籍)을 유지해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다쿠미의 묘만은’이라고 했지만, 실은 아주 최근 한국내에 한국인들이 지켜온 또 하나의 일본인 묘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기후현(岐阜県) 출신인 미즈사키 린타로(水崎林太郎)의 묘입니다. 미즈사키는 1915년 대구로 이주해와 가뭄과 홍수로 고통 받는 농민들을 위해 관개용 저수지를 축조하고, 1939년 72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이 고장의 농업발전에 헌신했습니다. 저수지 가까이에 자리한 그의 묘를 반일감정이 고조되거나 일한관계가 악화될 때도 이곳 주민들의 손으로 줄곧 돌봐왔으며, 올해도 4월 13일 지역민들이 위령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서울에 부임한 지 1년 8개월. 한국 각지를 여행할 적마다 분로쿠・게이쵸노에키(임진・정유재란) 때에 히데요시(秀吉)의 군대가 파괴했다는 곳이나 식민지 시절 일본이 저지른 잘못의 흔적을 만나곤 합니다. 역사적 사실인 이상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고개를 숙이고 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만큼 아사카와 다쿠미나 미즈사키 린타로의 묘소가 한국인의 손에 의해 지켜져 왔다는 것은 우리 일본인들로서 마냥 고맙고 감명 깊은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번역 : 김경희 번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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