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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맞이의 자세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다카하시 다에코(髙橋妙子)


3월은
  3월 들어 사방이 일시에 봄기운을 띠면 집안의 인테리어나 옷가지도 겨우살이에서 봄철용으로 바꿀 필요가 있어, 이 달은 왠지 가슴 설레는 한편 마음이 부산한 때이기도 합니다. 특히 일본인에게 3월은 연도말에 해당되는 까닭에 업무적으로도 꽤 바쁜 시기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떠들썩한 도회를 떠나 시골에서 스러져가는 겨울의 잔영을 아쉬워하며 오는 봄을 확인하는 고즈넉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참으로 호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지요? 서울에 온 뒤로 나의 다도스승이자 벗인 이춘실 선생의 초대를 받아 참석한 얼마 전의‘오차지(お茶事)’곧 다회야말로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오차지
  오차지란, 주인이 손님을 초대해 가이세키 요리(懐石料理 )와 차를 대접하는 정식 다회를 말합니다. 다회를 여는 계절이나 시작하는 시간에 따라 몇 가지 변형이 있을 수 있지만, 기본은 스미테마에(炭点前), 가이세키 요리, 고이차(濃茶), 우스차(薄茶)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스미테마에는, 손님 앞에서 미리 불씨가 들어 있는 풍로 속에 정해진 순서대로 숯을 집어넣는 예법입니다. 차의 진수가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고, 차를 타는’데 있음을 생각하면, 다회의 첫머리에 스미테마에가 오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한편 가이세키 요리에 대해서는 “아니, 다회라더니, 식사도요?”라는 질문을 자주 듣는데, 가이세키는 제철 의 재료 맛을 살린 간소한 상차림으로 다회의 크나큰 즐거움입니다. 또 다회에서는 보통 일본술도 나옵니다.
  그러나 다회의 묘미는 역시 진한 맛의 고이차 입니다. 나카다치(中立ち)라고 하여 식사가 끝난 후 주인이 다실을 치우고 고이차를 끓이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손님은 정원 툇마루에서 기다리다가 잠시 후 다실로 되돌아가면 그곳에는 고요함이 충만하고 차솥의 물 끓는 소리만이 아련히 들립니다. 고이차테마에(濃茶点前) 즉 진한 차 끓이기는 그런 속에서시작됩니다. 고이차는 고목에서 채취한 고급 말차(抹茶)를 소량의 뜨거운 물로 걸쭉한 느낌이 들 때까지 차선(茶筅)으로 저어서 내며, 법도에따라 차를 끓이는 주인과 이를 지켜보는 손님의 호흡이 일치할 때 거기 에는 좋은 의미에서의 긴장감이 넘칩니다. 그리고 이렇게 끓여낸 고이차를 한 입 머금었을 때 손님은 입안에 퍼지는 말차의 진한 향에 꽉 차오르는 느낌이 들고, 주인은 손님의 그 모습에 이제까지의 긴장이 풀립니다.
  다회는 옅은 맛의 우스차로 마무리되는데, 이는 말차에 뜨거운 물을 붓고 차선으로 저어 거품을 낸 것입니다. 일본인이나 외국인이나 부드 러운 거품이 이는 우스차가 고이차보다 마시기 쉽다는 분들이 많지만, 이는 친숙도나 혹은 취향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아무튼 우스차는 종 반에 주객이 편하게 대화를 즐기는 시간이며, 이후 주인과 손님 간에 서 로 인사를 나눔으로써 다회가 끝납니다.
  이처럼 다회는 보통 4시간여에 걸친 극진한 손님 대접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회 자체보다 몇 배나 되는 준비의 시간을 요합니다. 가이세키의 식단 선정부터 재료 구입은 물론 음식을 만드는 데도 나름 대로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또 다실 준비만 하더라도 도코노마(床の間) 에 걸 족자부터 스미테마에, 고이차테마에, 우스차테마에마다 쓸 도구 들에 이르기까지 계절감과 다회의 주제 등을 반영시키려면 어지간히 고 심 또 고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온갖 고심 끝에 열매를 거둬 주인의 정 성이 손님에게 전달되고, 대화가 무르익어 주객의 마음이 서로 통한 느 낌이 들게 되면 다회는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도 수년 전에 친구와 함께 다도 스승님의 고희(古稀)를 축하하는 다 회를 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가이세키 요리집의 다실을 빌리 고 요리도 그 집에 시켰는데도(일본에서는 이런 형식의 다회를 여는 일 이 제법 많다) 이런저런 사전준비 하며, 당일에도 꽤나 긴장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합니다.

차한가마(茶飯釜)
  서두가 좀 길어졌지만, 우라센케(裏千家)서울출장소 강사인 이춘실 선생으로부터 경기도 서종면 문호리의 다실에서 차한가마에 도전해보 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습니다.
  차한가마란 무엇일까요? 옛날 센노리큐(千利休)의 손자인 소탄(宗旦) 이 사카이(堺) 지방의 소토쿠(宗徳 )라는 다인(茶人)에게 차솥(茶釜)을 주 었답니다. 그러자 소토쿠가 이를 매우 기뻐하여 평생 그 솥으로 차를 끓 이고 밥을 짓는 차삼매(茶三昧)의 삶을 보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차한 가마는, 센노리큐와 소탄이 추구했던‘와비차(侘び茶)’(주1)의 형태로 일 본에서도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다회로 칩니다. 왜냐하면 다실 안에서, 더욱이 손님의 눈앞에서 차솥에 밥을 지어 드린 다음 그 솥을 씻어내고 물을 끓여서 차를 타는 것이므로 웬만큼 노련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제 대로 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선생의 다회는 한국에서 일본 다도를 배우는 분들 사이에서 정평 이 나 있지만, 차한가마는 처음인 데다가 그것도 시골의 본격적인 다실 에서 한다고 하니까 어떻게 전개될지 흥미진진했습니다. 이리하여 3월 의 어느 일요일, 시게이에(重家) 대사 부인과 우리 모두의 벗인 정호연 씨와 함께 그곳을 찾았습니다.

서종면 문호리에서
  ‘사각하늘’이란 이름의 다실은 서울에서 차로 1시간 반 거리에 있었 습니다. 불교에 조예가 깊고 일본 다도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한국 분이 일본 건축가에게 의뢰해 10년 전쯤에 지었다고 하는데, 지난 10년간 잘 건사해온 덕이겠지요. 소박하면서도 깔끔하고 고루 손길이 미친 느낌 이었습니다. 다실에 들어가니 도코노마에는 한국어로‘차나 마시게’라 고 쓴 족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송광사 지묵(知黙) 스님의 글씨라고 하 는데,‘ 차나 마시게’는‘喫茶去’(주2)란 중국어에서 온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글이 한자 이상으로 고사(故事)의 뜻을 웅변적으 로 전해주고 있어 시골 초막에 딱 어울리는 족자다 싶었습니다. 한편 스미테마에 때 사용한 향합에는‘世の中にたえて桜のなかせ、ば春�のこころはのどけからまし’라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在原業平)(주3) 의 와카(和歌)가 적혀 있었습니다. 차의 세계에서는 늘 계절을 앞서가는 것을 멋이요 풍류로 치고 있어 벚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때였기에 사용 할 수 있는 향합인 셈입니다. 참고로 내가 입은 기모노(着物)도 벚꽃무늬였습니다.
  다시 이야기를 돌려서, 스미테마에가 끝나고 나면 가이세키 차례입 니다. 이 선생은 미리 씻어둔 쌀 소쿠리를 다실로 들여와 차솥의 끓는 물속에 스르르 부었습니다. 밥이 다 되려면 15분 남짓. 다른 음식을 먼 저 내 오려나 했더니, 이 선생은 조붓한 종이와 붓펜을 가져와 밥이 뜸 들 때까지 와카나 짓자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 나는 아까 향합에 찬사를 보낸 것을 조금 후회했으나, 이제 와 생각하면 이 또한 즐거운 추억거리 입니다. 어쩌다 고등학생 작품 같은 와카를 지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좌중 앞에 내놓긴 했지만, 여기서 되풀이하는 것만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밥이 다 됐습니다. 숯불로, 더욱이 쇠솥에 지은 밥이니 맛이 없을 리가 없지요. 밥뿐만이 아닙니다. 국이랑 나물, 냄비 요리, 얕은 양념장의 삼치구이 등 이 선생이 준비해온 반찬들은 하나같 이 섬세한 맛이라 혀끝에 감미로웠습니다. 다른 다회와는 달리 손님 앞 에서 밥을 짓다 보니 자연스레 주인과 손님의 거리도 좁혀졌습니다. 바 로 이것이 차한가마의 즐거움임을 실제로 경험해보고야 알았습니다.
  이 선생의 다회는, 가이세키 후의 고이차나 우스차도 모두 주인의 살 뜰한 마음이 느껴지는 멋진 다회였습니다. 다완(茶碗)과 물항아리 같은 도구들도 오랜 세월 다도에 몸담아오면서 수집한 한국산 도자기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이 다실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형언할 수 없이 그윽한 느낌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4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겠지만, 그야말로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고 시골 초막에서의 다회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정성을 다한 손님맞이
  오래 전 파리에서 근무할 때로, 프랑스 친구 집에 저녁 초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8시 초대 시간에 맞춰 가도 전원이 다 모이는 것은 9시 쯤. 식사 전에 술을 들다가 식탁에 앉는 것이 9시 반경이고, 전채와 메 인 요리를 거쳐 디저트가 나오는 것이 12시 지나서라, 식후에 커피랑 술 까지 마시다 보면 작별을 고하는 시간은 거의 새벽 1시를 넘기는 게 보 통이었습니다. 이는 프랑스 사람들이 얼마나 천천히 만찬을 즐기는가 를 보여주는 일화이며, 한편 4시간 이상 걸리는 저녁식사가 끝날 무렵이 면 주인과 손님은 물론 초면인 손님들끼리도 허물없는 사이가 됩니다. 나는 다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로, 프랑스에서의 이 경험과 다회 의 공통점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했습니다. 손님 대접에 정성을 다하는 주인의 마음과, 이를 감사히 여기는 손님의 마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번에 이 선생이 연 다회는 서양인과 동양인, 혹은 일본인과 한국인을 불 문한 바람직한 손님맞이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1) 화려함을 배제한 생활속의 소박한 형태의 다도
  (주2) 옛날 중국에 훌륭한 스님이 계셨다. 그의 문전에는 가르침을 청하러 오는 수행승의 발길이 끊이 지 않았으나, 그는 늘‘차나 마시게’라는 말 한 마디뿐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명문 출신이 가르침을 청 하러 왔지만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으며, 스님의 그런 모습이야말로 선(禅�)의 정신, 차(茶)의 정신이라는 가르침이다.
  (주3)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초기의 가인(825-880년). 봄철의 벚꽃은 피기를 기다리는 마음이나, 또 핀 후에는 한순간에 질까 봐 안타까운 나머지 사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한다. 그런 벚꽃이 아예 없었다면 훨씬 한가롭고 편하게 봄을 지낼 수 있으련만, 하고 노래한 매우 유명한 와카이다.


번역 : 김경희 번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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