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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다카하시 다에코(髙橋妙子)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다카하시 다에코( 髙橋妙子)
지난 8월, 일본과 한국을 두 차례나 왕복했습니다. 한 번은 고령의 부모님 문안차, 두 번째는 규슈(九州)의 쓰시마에서
야마구치현(山口県)의 시모노세키까지 일한교류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서였습니다. 아프리카 같은 먼 나라에서 근무하느라 좀처럼
귀국하지 못하는 동료들을 생각하면, 이토록 쉽게 갈 수 있다는 게 미안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국 근무의
고마움 중 하나. 특히 나처럼 고령의 부모님이 계신 경우, 단시간에 귀국할 수 있는 환경인 것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입니다.
한편 연간 500만 명이 양국을 오가는 지금, 나도 가끔은 사람들 틈에 섞여 참가자의 자격으로 일본의 현장에서도 일한교류를
체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한의 교류사에 관심이 있는 일본인과 한국인들로 구성된 시모노세키 여행팀에 참가하기로
하면서, 아울러 쓰시마도 둘러보기로 한 것입니다.
〔쓰시마〕
쓰시마는
예로부터 대륙과 일본의 문화, 경제, 군사상 중요한 구실을 했던 섬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은(銀) 광산이 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1338-1573년)부터 에도 시대(江戸時代:1603-1867년)에 걸쳐 특히
조선과의 교역 창구로서 번성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일본 막부(幕府)에 십여 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맨 처음 쓰시마
북부에 배를 댄 후,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며 섬 곳곳에서 접대를 받은 뒤 이키(壱岐) 섬을 거쳐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지난해 조선통신사 400주년에 즈음하여 그 역사를 배우면서 ‘나도 조선통신사가 나아갔던 뱃길을 가보고
싶다. 그리고 ‘국경의 섬・쓰시마’에서 바다 건너의 한국, 부산의 해안선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습니다. 부산에서
쓰시마 북단까지 49.5km라는 그 거리감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모노세키 여행을 같이 할 예정인
한국인 L여사에게 말해 둘이서 쓰시마를 통해 가기로 한 것입니다.
서울에서 KTX로 부산으로 가서, 거기서 쓰시마의 이즈하라항(厳原港)까지 약 2시간 반의 기다리고 기다리던 뱃길 여행이었습니다.
L여사는 “배로 외국에 가는 건 처음예요.”라며 다소 긴장한 눈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딴은 나도 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규슈 북부에서 한반도에 걸쳐 강우 전선이 형성되었다는 예보와 함께 바다가 사납게 일렁거렸습니다. 이래서야
정말로 쓰시마에 당도할 수 있을까 싶더군요. 참고로 그 날은 8월 22일. 베이징 올림픽 야구 일한 준결승전이 있던 날로
승부의 향방도 궁금했습니다. 그제야 처음 깨달은 것이지만, 페리는 쓰시마 관광에 나선 한국인 가족과 단체객들로 꽉 차서
소리 내어 일본팀을 응원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선내의 TV 중계가 시작되자 처음엔 일본팀의 승리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원했으나, 경기가 진행됨에 따라 뱃멀미로 고생하던 친구 L여사는 쌩쌩해진 반면에 나는 어서 빨리 쓰시마에 도착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부산에서 쓰시마로 건너가는 한국인 관광객은 얼마나 많던지요. 보통 국제공항에서는 입국심사장의 경우 ‘외국인용’과
‘일본인용’으로, 한국의 공항 같으면 ‘한국인용’으로 나뉘어 있어 둘 중 어느 쪽인가에 줄을 서야 하지만, 이즈하라항은
모든 표지가 ‘외국인용’으로서 일본인의 입국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은 듯했습니다. 실제로 입국관리관도 내가 서울 주재
일본인 외교관이란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으며, 묵었던 호텔에서도 ‘쓰시마를 관광차 찾는 일본인은 드물다’고 했습니다. 이에
비해 부산 근교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쓰시마는 선뜻 갈 수 있는 외국으로 해마다 한국인 관광객 수도 증가하고 있고, 또
개중에는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별장을 구입하는 한국인도 있다고 합니다.
쓰시마의 관광명소를 보면, 이즈하라 시내만 해도 쓰시마 번주(対馬藩主) 소(宗)씨 가문 대대의 묘소와 위패를 모시고 있는
보다이지(菩提寺)인 반쇼인(万松院)、덕혜옹주 결혼기념봉축비(李王家・宗伯爵家結婚奉祝記念碑), 쓰시마한(対馬藩)에서 조선통신사
접빈역을 맡았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의 묘 등등 일한관계 업무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충분히
흥미로운 유적 명소가 많았습니다. 매년 8월 첫 주말에는 아리랑축제가 열려 조선통신사 행렬도 재현되니 그 때 오면 재미있을
거라더군요. 그러나 자동차로 섬을 종단하면서 느낀 점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풍성한 초록의 섬 풍경이야말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값진 성찬(盛饌)이란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전날(출발 당일)부터 내리던 비가 개는 가운데,
자동차로 북상해감에 따라 어쩌면 쓰시마 북단에 있는 한국전망대에서 부산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정작 전망대에 올라보니 한반도엔 아직도 안개가 낀 채로였습니다. 그러나 “저기, 저 붉은 색 쾌속선이 향하는 쪽 안개
속에 어렴풋이 산줄기가 보이죠?”라는 가이드의 말에 딴은 보이는 성 싶기도 하더군요. 그래서 ‘찰칵!’ 하고 마음속으로
셔터를 눌렀습니다.
〔시모노세키〕
시모노세키는
조선통신사 일행이 혼슈(本州)에 첫발을 디딘 상륙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갔던 주말에도 ‘바칸 마쓰리(馬関まつり)’(주1)가
열려 조선통신사 행렬도 볼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쓰시마에서 시모노세키는 제트 페리로 하카타항(博多港)으로 나가는 데
2시간 15분, 다시 하카타역에서 신칸센(新幹線) 등으로 갈아타고 1시간 남짓의 거리에 있습니다.
시모노세키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직접 가보고 이 도시가 역사의 보고임을 발견했습니다. 바다 건너 모지(門司)와의
사이에 가로놓인 간몬 해협(関門海峡) 위쪽에는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 속에 나오는 단노우라 싸움터(壇の浦古戦場)가
있고,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1584-1645)와 사사키 고지로(佐々木小次郎:?-1612)가 검을 겨룬 간류지마(巌流島)도
시모노세키의 앞바다에 있습니다. 막부 말부터 메이지(明治:1868-1912) 초기에 걸쳐 활약한 쵸슈(長州:야마구치현
북서부의 옛 이름)인들의 발자취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알려진 일청강화조약(日淸講和条約,
1895) 체결 장소를 ‘일청강화기념관’으로 보존, 당시 일본과 대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또 구(舊) 시모노세키영국영사관과 구 아키타 상회(秋田商会) 빌딩 등도 당시 시모노세키의 번창했던 모습을 짐작케
합니다.
그러나 이번 우리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시모노세키항 국제터미널’을 방문해 ‘관부(関釜) 페리’의 역사를 배운
것이었습니다. 근대적인 건물로서 부산뿐만 아니라 중국의 상하이(上海)나 칭다오(靑島) 간에도 정기 항로가 개설되어 있다는
설명에 지금의 국제항구로서의 시모노세키의 위상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이번 여행에 동행했던 한국인 역사학 교수로부터
시모노세키 조약을 계기로 일본이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관부(関釜) 페리’가 수행한 역할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교수가 역사적 사실을 담담히 설명하자 참가자들은 일제히 일본인도 한국인도 옷깃을 여미고 이를
경청했습니다.
시모노세키항은 그간 확장 정비를 거듭해왔으며, 현재의 부두는 매립을 통해 바다 쪽으로 상당히 나와 있다고 했습니다. 그
탓인지 근대적인 터미널 빌딩에서는 ‘관부(関釜) 페리’의 역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야말로 ‘少しのことにも先達はあらまほしきことなり(조그만
일이라도 앞에서 이끌어주는 안내자가 있었으면 좋겠다)’(주2)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1) 바칸(馬関)은 시모노세키의 옛 이름.
(주2) <쓰레즈레쿠사(徒然草)>의 52단 ‘닌나지의 한 스님(仁和寺にある法師)’에서.
사진설명
아카마 진구(赤間神宮):헤이케(平家)와 겐지(源氏)의 최후 결전장인 단노우라에서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의 손자뻘인
안토쿠 천황(安徳天皇)은 겐지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피해 물에 몸을 던졌다. 그의 혼백을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 아카마
진구이다.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바다 속의 ‘용궁’을 본떴다고 한다.
[번역: 김경희 번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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