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관 안내 >> 대사관 칼럼 >> 공사 외 칼럼
 
     
   
'야키니쿠 드래곤'을 보고 - 한국의 5월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다카하시 다에코(髙橋妙子)


지난 호에 5월의 햇살에 끌려 전라남도를 여행한 글을 실었는데, 한국의 5월은 지방뿐만 아니라 서울도 활기를 띠게 합니다. 시내 곳곳에서 갖가지 문화 행사가 열려 나도 여러 편의 연극을 보거나 콘서트에 가고, 또 전시회를 구경했습니다. 특히 콘서트는 하나같이 수준이 높아서, 과연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를 많이 배출하고 있는 나라답구나 싶었습니다. 한편 연극은 [지하철 1호선][야키니쿠 드래곤 - 용길이네 곱창집][백년언약] 등을 감상했는데, 솔직히 언어의 장벽을 통감하지 않을 수없었습니다.
[지하철 1호선]은 백두산에서 사랑을 나눈 연인을 찾아 서울에 온 연변 처녀가 하루 동안‘588’이라는 사창가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접하면서 자립해가는 모습을 그린 록뮤지컬입니다. 관람 당시 이미 3779회라는 한국 뮤지컬 사상 최다 공연기록을 달성했고 지금도 계속 기록을 경신중이라‘일본의 새소식’독자들도 보신 분들이 많지 않을까요. 2001년 일본 공연이 있은 이래 일본에도 잘 알려져 일본 관광객들 가운데도 대학로의 학전 소극장에 이 뮤지컬을 보러 오는 사람이 적지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매주 화, 목, 토요일에는 일본어 자막이 나온다기에‘그렇담 나도 꼭 봐야지’하고 보러 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막을 눈으로 쫓다 보면, 경쾌한 록 리듬에 맞춰 전개되는 무대 위 배우들의 코믹한 연기나 표정을 볼 여유가 없습니다. 서울에 부임한 후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나로서는‘으응, 그래, 확실히 서울의 지하철 안에는 저런 사람이 있지’싶은 장면들이 많아서 참 유쾌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자막을 읽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관중들의 웃음소리에는 솔직히 속이 상했습니다. 함께 간 문화원 직 원들은 지방 사투리가 많이 나와 한국 사람이라도 알아듣기 힘든 데가 있었다지만, 그래도 줄곧‘좀 더 말을 알았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백년언약]은 아예 자막도 영어였습니다. 게다가 장소도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의 넓은 무대라 무대 옆의 자막과 무대 위의 연기자들 사이로 바삐 시선을 움직이다 보니 금세 지치고 말았습니다. 한국연극 1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라 최고 원로배우인 장민호 씨와 백성희 씨를 메인 캐스트로 맞아들였으며, 또한 한국연극계의 거장 오태석 씨가 감독 및 연출을 맡은 굉장히 의욕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나도 어떻게든 줄거리를 따라가려고 처음엔 필사적이었습니다. 허나 2차대전 종료 직후부터 남북분단, 한국전쟁,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등 정치 사회정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쫓아가기가 버거워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곁에 앉은 유명한 연극 평론가가“연극은 이해하려하지 말고 느끼면 됩니다.”라고 하더군요. 이는 마치 오카모토 타로의‘예술은 폭발이다!’에 가까운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막에서 눈길을 거두고 무대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감성이 무딘 탓일까요.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뒷날 만난 국립 극장 관계자의“한국 사람인 나도 그 연극은 어려웠어요.”라는 말이 다소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야키니쿠 드래곤 - 용길이네 곱창집]은 편했습니다. 여하튼 대사의 절반 이상이 일본어였으니까요. 더구나 이야기 자체가 1970년의 만국박람회 개최로 끓어오르던 오사카에서 가난으로 허덕이던 재일한국인의 일상을 그린 것이라 시대 배경 등이 일본인인 내게는 비교적 이해하기 쉬웠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래도 한국어를 좀 더 알아서 자막에 의지하지 않고 미묘한 뉘앙스까지 즐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 연극이었습니다.


나는 도쿄에서 북으로 100km 남짓 떨어진 도치기현에서 태어났으므로 주위에‘재일한국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재일한국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대학생이 된 후 일본과 한반도의 역사적 관계와 그 속에서‘재일한국인’이 생겨난 경위 등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일 뿐이어서‘재일한국인’ 문제를 피부로 느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 이번에 [야키니쿠 드래곤]을 보고, 한 마디로‘재일 한국인’이라 해도 일본에 온 시기 등에 따라 일본어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등의 실로 기본적인 사실에서 시작하여, 무엇보다도 작품속의‘재일 한국인’들이 모국인 한국에 대해 짙은 그리움을 안고 있으면서도 일본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 필사적으로 버티는 모습에 한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버지 김용길은 명문 사립학교에 입학한 외아들이‘재일한국인’이란 이유로 심한 괴롭힘을 당해 실어증에 걸렸는데‘재일한국인’은 그에 지지 않고 살아가는 강인함을 지녀야 한다며 아들의 전학에 반대 합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의 눈앞에서 지붕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맙니다. 그 때의 애처로움, 안타까움은 김용길이 막내사윗감한테 그간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장면과 더불어 지금도 마음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일본군에 징용되어 일본을 위해 싸우다가 오른팔을 잃은 후로 나의 인생은 오직 가족을 지키고자“일하고, 일하고, 일만 했다”고 담담히 말하는 김용길에게 많은 일본인들도 공감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이 작품은 서울 예술의전당과 일본 신국립극장이 공동 제작한 것입니다. 영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피와 뼈] 등의 작가로 유명한 정의신 씨의 원작을 재일한국인인 정의신 씨와 한국인 양정웅 씨가 같이 연출하고 일한양국의 배우들이 합동 출연한, 그야말로 한국말과 일본말이 비빔밥처럼 난무하는 떠들썩한 무대였습니다. [야키니쿠 드래곤]은 예술의전당과 신국립극장이 각기 개관 20주년과 1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일한 합작품으로, 두 극장이 함께 작업한 작품으로서는 2002년과 2005년에 공연했던 [강 건너 저편에는]에 이어 2번째입니다. [강 건너 저편에는]은 일한양국에서 대성공을 거뒀으 며, 특히 일본에서는 아사히무대예술상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야키니쿠 드래곤]도 서울공연에 앞서 도쿄에서 먼저 공 개되었는데, 갈수록 인기가 높아져 끝날 무렵에는 티켓 구하기가 어려웠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관계자는 이번 한국공연의 성공을 내심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론‘재일한국인’을 테마로 한 작품이라 한국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는군요.
딴은 한국에서의‘재일한국인’에 대한 편견은 일본과 마찬가지거나, 때론 그 이상으로 강하다는 이야기를 서울에 와서 들었습니다. 몇 달 전 한국의 모일간지에‘미국대학에서 학위를 따고 성공한‘에리카 김’은 동경의 대상이지만 일본판‘에리코 김’은 그렇지 않은 것은 무슨 까 닭일까’라는 내용의 칼럼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야키니쿠 드래곤]에 관한 한 극장 관계자의 불안은 한낱 기우로 끝났다고 하겠습니다. 나는 첫날과 둘째 날의 공연을 봤는데, 둘째 날에는 기립박수가 이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첫날은 연기자나 관람자나 조금 경직되어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공연 마지막 날 갔던 친구들도 정말 감동적이고 훌륭 한 작품이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최근 일본에서는‘한류’가, 한국에서는‘일류’가 일상생활 속에 파고들어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보다 주목할 것은, 이번 [야키니쿠 드래곤] 같은 일한 합작 내지는 일한 공동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비단 연극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가령 TV 드라마는 [하얀 거탑] [연애시대] [연인이여], 영화는 [올드보이] [미녀는 괴로워]와 같이 멋지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다수 탄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문화교류란 기본적으로 쌍방향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일한의 문화가 만남으로써 서로 자극을 주고 받으며 새로이 더욱 풍성한 문화작품이 생성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21세기 일한문화교류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번역 : 김경희 번역관)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contact 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