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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고택에서의 하룻밤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다카하시 다에코(髙橋妙子)


4월 중순, 처음으로 안동을 찾았습니다. 조선시대의 문화가 짙게 남아 있는 고장으로 유학계의 거두 퇴계 이황이 세운 도산서원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진 봉정사와 같은 역사적 사찰뿐만 아니라 안동 한우, 안동 간고등어, 안동 찜닭, 나아가 안동 소주에 이르기까지 식욕을 자극하는 특산물도 많은 곳입니다. "물론 공보문화원장으로서 900년도 더 전의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다는 하회마을의 탈춤도 빠뜨려선 안 되겠죠" 하고 안동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국 문화원의 동료를 중심으로 한국인 2명, 일본인 4명, 모두 6명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서울 강변역의 동부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약 3시간. 안동에선 일행 중 한 사람이 대학 후배를 통해 마련한 차와 안내할 여대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차로 안동 교외로 나서자, 낙동강의 양쪽 기슭으로 평온한 봄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드문드문 정자가 보였습니다. 역사가 일상의 일부로서 숨 쉬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하회마을, 도산서원, 봉정사, 오천 유적 등의 역사적 건축물도 그랬습니다. 주변에 근대적인 건물의 신축을 허용하지 않아서일까요. 건축물 하나하나가 저마다 주위의 산간 풍경과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 풍경 속에서 잿빛 기와지붕이 더욱 아름답게 비쳤습니다. 새삼 기와지붕은 동양미(東洋美)의 한 형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데 안동여행의 참맛은 뭐니뭐니해도 고택(古宅)에 머무르는 거란 얘기를 들었습니다. 고택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옛날 양반가의 집을 숙박시설로 이용토록 한 것으로, 그 중에는 여러모로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고택도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우리도 그 곳에 숙소를 잡고 싶었습니다. 그런 고택에서 안동소주를 마시는 상상을 하면서요.



  봄철 관광이 한창인 이 때, 우리 일행 6명을 받아들인 고택은 안동 시내에서 1시간 거리의 산 속에 있었습니다. 3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옥이 몇 년 전 임하(臨河)댐의 건설로 수몰될 운명에 처했으나, 고택문화 보존을 위한 공적 보조를 받아 지금의 장소로 이축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그 곳에서는 임하댐의 아름다운 호수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손님방으로 안내되어 주인으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집에서 산다는 것은 조상의 제사를 지낼 의무와 책임을 함께 떠맡는다는 것, 그리고 그 제사는 집안에 있는 사당에서 지내며, 안주인은 제사음식을 잔뜩 장만해야 하고, 그런 제사가 1년에 수차 있다는 것 등등.
  한편 일본에도 '호지(法事)'라는 의식이 있는데, 이는 일가친척이 고인을 기리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한 불법(佛法) 행사로 스님이 집에 와서 독경을 하거나 혹은 절에서 스님이 직접 재를 올려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님의 독경과 설법에는 상당한 액수의 사례금을 지불합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주인은, 한국의 제사는 유교의 전통을 따른 것이지 종교행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교의 나라 한국이 지금도 이런 형태로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는 생각입니다.
  참고로, 우리는 상에 빙 둘러앉아 그 날 시내 슈퍼에서 사온 안동소주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주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듣기로 안동소주는 알콜도수 40도에 냄새도 아주 강해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마시기 힘들다고 했으나, 막상 마셔보니 어느 쪽인가 하면 일본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고구마소주와 비슷해서 마시기도 깔끔하고 맛있다는 게 우리 6명의 결론이었습니다.   소주에 대한 우리의 담론을 듣던 주인은, 자신이 고택보존협회 회장을 지내고 있고 일본의 협회와도 교류를 해왔다는 것 등을 이야기했습니다. 일본에도 몇 차례 다녀와 히다타카야마의 고택에 대해서도 밝은 듯 했습니다. 세계는 정말 좁습니다. 주인은 또 많은 외국인들이 묵으러 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전에 프랑스인이 단체로 묵었는데, 온돌에서 잔 경험이 없는 그들은 이불과 요가 구분이 안 됐나 봅니다. 이튿날 방안을 들여다보니 이불을 세 개나 겹쳐 깔고 그 위에 누워 자는 거예요." 하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습니다. 그러더니 '댁들은 일본인이라 요에서 잔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요.' 하고 말을 맺었습니다.
  "글쎄요, 한국의 이부자리는 처음이지만 아마 괜찮겠죠. 오히려 밤중에 춥지나 않을까 걱정예요."하고 나는 대꾸했습니다. 밤이 이슥해지자 방안에서도 왠지 으슬으슬했습니다. 한국인 일행들도 고택에서 자는 것은 처음이라 좀 불안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군불을 땠으니 괜찮아요. 옛날처럼 소나무 장작을 지피고 있으니까 새벽까지 따뜻할 거요." 라고 장담했습니다. 한바탕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소주병도 비었고, 이제 슬슬 잠잘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나와 한국인 L양은 대청 왼편 안쪽의 침실을 함께 쓰게 되어 각자 이부자리를 깔았습니다. 그런데 아랫목을 지그시 쳐다보던 L양이 "원장님, 이쪽 방바닥 색깔이 짙네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온돌이 뜨거워 탔나 봐요. 이쪽이 더 따뜻할 테니까 여기서 주무세요." 하고 곰살맞게 마음을 썼습니다. 지난달 감기가 덧들려 오래 고생했던 나는 그녀의 살가운 배려를 순순히 받아들여 아랫목에 자리를 깔았습니다. 요가 좀 얇은 것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런 만큼 어떤 게 이불이고 어떤 게 요인지 망설일 것도 없이 쓱쓱 준비 완료하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처음엔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살짝 얼었던 몸에 온돌의 열기가 은근히 전달되어 와서요. '역시나 얇은 요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군!' 그러나 1시간쯤 지나자, 상황은 점점 바뀌었습니다. 따뜻하긴 커녕 요 밑이 자꾸 뜨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얇은 요를 통해 딱딱한 바닥이 신경 쓰이더니 차츰 등이 배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랬었지. 도쿄(東京)에 살 때, 휴가를 맡아 집에 돌아가면 늘 손님용 이부자리를 펴주는 바람에, 침대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첫날은 제대로 잠을 못 잤어!'
  이런 시시콜콜한 일까지 생각나 영 잠을 못 이뤘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벌떡 일어나 가만히 반침을 열어 봤지요. 그 속엔 아직도 이부자리 몇 채가 쌓여 있었습니다. 나는 L양이 눈을 뜰세라 조심조심 몇 장을 끄집어내어 요 위에 덧깔았습니다. 그 위에 살며시 몸을 누인 나. "이거야, 주인이 말한 프랑스 사람하고 똑같잖아!" 하고 혼잣말을 하다가 잠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진 촬영 : 구니타 다쓰오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전문조사원
번역 : 김경희 번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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