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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의 이름(茶名)을 받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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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다카하시 다에코(髙橋妙子)

차메이를 받은 후
리큐도 밖에서 모리 선생님(오른쪽)과 함께... 뒤에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 란 족자가 보인다. 매년 이맘때면 버들잎엔
푸른 잎이 돋고, 화초는 붉은 꽃을 피운다. 해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만 어떻게 보이는가는 사람마다 받아들이기 나름이라는
뜻이다.
정말이지 지독한 감기였습니다. 처음엔 ‘감기 걸렸다’는 한국어 표현을 배워 이를 마냥 연발하며 즐길 여유마저 있었습니다. 그러나 39도 8부까지 열이 오르자 아무 정신도 없었습니다. 의사의 왕진을 부탁해 혈관주사를 맞고 약을 처방받아 그저 열이 내리기를 기다릴 뿐. 그럭저럭 반나절 만에 열은 38도 남짓까지 떨어졌으나, ‘한국인은 혈기 왕성한 분들이 많다 했더니 감기도 파워풀하네요.’라는 농담이 입에서 나오는 데는 다시 며칠이 더 걸렸습니다. 그러다 기관지염까지 겹쳐 아직도 목 상태가 정상이 아닌데, 지금은 이를 ‘황사 탓’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번에 이처럼 증상을 악화시켜 질질 끌게 된 데는 자업자득인 구석도 있습니다. 가까스로 열이 내린 며칠 뒤의 회복기에 무리하게 주말을 이용해 도쿄(東京)와 서울을 왕복한 탓입니다. 아니, 오히려 주사라면 질색인 내가 굳이 굵은 혈관주사도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 다음 주말로 예정된 도쿄행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감행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2월초, 도쿄에 계신 다도 스승 모리 아키코(森明子) 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 선대 이에모토(家元:한 유파의 당주) 및 당대 이에모토의 두터운 배려로 내 밑에서 오랫동안 다도를 배운 제자들에게 차메이(茶名)를 내리게 되어 무척 기쁘다. 그래서 이에모토를 대신해 3월 15일 차메이(茶名) 수여식을 가지려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감사한 일이, 다인(茶人)으로 인정받는 차메이를 받다니!’ 하는 놀라움과 더불어 나는 이미 ‘세상없어도 15일엔 도쿄에 가야지.’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직 여러분께 말씀드린 적은 없지만, 실은 지난 10여년간 나는 일본의 다도를 제법 진지하게 배워왔습니다. 외무성에 몸담고 있으면서 몇 차례 해외근무를 거듭하다보니, 다른 나라에 흥미가 끌리는 만큼이나 일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저런 이유로 모리 아키코 선생님 문하에서 우라센케(裏千家) 다도를 배운 겁니다.
그간 일본의 다도와는 별 인연이 없었던 독자 분들이 계실지 몰라 잠시 설명을 드리면, ‘차’는 나라 시대(奈良時代:710-784년)에 당나라에 파견했던 견당사(遣唐使)에 의해 중국에서 들어왔습니다. 당시 차는 아주 고가품으로서 각성 효과 등 때문에 귀한 약으로 여겼으며, 절 등에서 부처님께 바치거나 스님들이 수행하기 전에 마셨다고 합니다.
그 후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1338-1573년)에 이르러 중국에서 들여온 가라모노(唐物) 애호가들의 차 모임인 ‘가이쇼노 차’(書院台子の茶式:널찍한 서원풍의 방에 중국에서 온 다구(茶具) 등의 미술품을 장식하고 다이스(台子)라는 차탁에서 차를 끓여 즐기는 방식)이 탄생한 한편, 차의 본질을 연구하고 정신을 추구하는 흐름도 생겼습니다. 후자에 속하는 이가 바로 센노리큐(千利久:1522-1591년)로서 ‘소안차(草庵茶)’ 혹은 ‘와비차(侘び茶)’의 형식을 대성시킨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소박하고 고즈넉한 꾸밈새의 다실인 초암(草庵)에서 맛있는 차를 통해 주인과 손님의 마음이 오가는 데서 의의를 찾는 다도의 형태입니다. 한국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휘하의 우두머리 다인이던 센노리큐가 훗날 조선침략에 반대했다는 등의 이유로 할복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한 줄 압니다.
내가 배운 우라센케 다도의 ‘우라센케(裏千家)’는 ‘오모테센케(表千家)’ 및 ‘무샤고지센케(武者小路千家)’와 더불어 센노리큐의 계보를 이루는 ‘산센케(三千家)’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일본에는 산센케 외에도 많은 유파들이 존재하며, 저마다 이에모토 곧 당주들이 긴 역사를 거쳐 갈고 닦은 각 유파의 격식을 전하고 있는데, 우라센케는 전후(戰後)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해외에 다도를 널리 보급하는 일에 적극 힘써 왔습니다.
이는 지금의 16대 이에모토 자보사이 센소시쓰의 아버지인 15대 이에모토 호운사이 센겐시쓰의 전쟁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센겐시쓰는 2차대전 때 특공대 훈련을 받고 출전하기 며칠 전에 종전을 맞음으로써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지만 많은 전우들은 이미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센겐시쓰는 전후 다인으로서 ‘한 잔의 차로 평화를!’이란 모토 아래 일본 다도의 해외 보급에 전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나의 다도 스승인 모리 아키코 선생님은 오랜 세월 우라센케의 국제부장으로서 호운사이의 해외활동을 보좌해온 분입니다. 참고로 자보사이와 호운사이 같은 호칭을 사이고라 하는데, 다도 수행의 한 과정으로 고승 밑에서 참선 수행을 하고 받는 이름이라 역대 이에모토를 각각의 사이고로 부르는 게 보통입니다.
사실 나는 모리 선생님께 배우기 전에도 동네의 다도 교실을 기웃거린 적이 있으나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세세한 격식과 절차를 외운다는 게 영 거북하고 성가셨습니다. 그렇지만 모리 선생님은 격식을 별로 따지지 않는 대신 다도의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를테면 맛차(抹茶)의 경우, 우라센케에서는 찻그릇을 받으면 오른쪽으로 2번 돌려 마시는 것이 기본 예법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는 주인이 그 날의 손님을 위해 찻잔을 고르고, 마음을 담아 차를 끓여 찻잔의 정면(찻잔의 얼굴)이 손님께 향하도록 놓습니다. 그러면 손님은 찻잔의 정면에 입술을 대고 마시는 것이 송구스럽다 하여 이를 피하고자 찻잔을 돌리는 겁니다. 그러니 사실 돌리는 회수는 2번이든 3번이든 상관없지요.”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이렇듯 모리 선생님께 배우다 보면 ‘아, 그렇구나!’ 싶은 적이 많았고, 문득 깨닫고 보니 다도를 배우는 것이 참 즐거워졌습니다. 그러자 반대로 세세한 예법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차메이(茶名)를 받는다’는 것은 이에모토로부터 다인으로서의 이름을 받는다는 뜻이며차메이에는 보통 역대 이에모토의 ‘소(宗)’란 한 글자가 들어갑니다. 예를 들면 원래 내 이름은 다카하시 다에코이지만, 이번에 이에모토의 허락으로 ‘소묘(宗妙)’란 차메이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일본어를 배우신 분은 아시겠지만, 일본 한자는 음독과 훈독이 있어 ‘妙’를 음독하면 ‘묘’, 훈독하면 ‘다에’가 됩니다.
차메이 수여식은 도쿄의 우라센케 저택 안에 있는 ‘리큐도(利久堂)’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리큐 거사(利久居士)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소묘’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지금껏 익숙했던 내 이름에 ‘宗’란 한 글자가 더해짐으로써 이토록 무게감을 갖는 것일까 하고 왠지 온 몸이 바싹 조여드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이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런 저희들의 심정을 헤아리셨는지, 모리 선생님이 리큐도에 걸린 족자의 글을 풀이해 주셨습니다. 일본어로는 ‘지키니반초칸오토오루 세이류리니모토도마라즈’라 읽는데, ‘몇 겹이나 되는 비의 벽을 지나 겨우 푸른 하늘 아래로 나왔으되, 거기 안주하면 푸른 하늘은 다시 사라져 버리니 앞으로도 정진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이는 16세기 리큐 거사와 같은 시기에 교토 다이토쿠지 주지를 지낸 슈오쿠소엔(春屋宗園) 스님의 글씨입니다.
한국도 고려시대에는, 위로는 궁중의 다례 (茶例)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차를 즐기는 문화가 성행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고려시대 찻잔은 일본의 다인들 사이에서 매우 귀히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 지금도 한국의 절에 가면 스님들이 차를 마시면서 불법을 논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나도 어렵사리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니, 이참에 한국의 차(茶)의 역사에 대해서도 공부해볼까 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어서 건강을 되찾아야겠지요. 빨리 따뜻해져서 황사 없는 계절이 왔으면 싶습니다.
(참고)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에서는 올 1월에 오모테센케 다도를, 3월에는 우라센케 다도를 소개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를 마련해 일본의 다도문화를 알릴 생각입니다.
번역 _ 김경희 변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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