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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랑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다카하시 다에코(髙橋妙子)



한국의 명절 구정(舊正). 신정보다 중히 여기며, 추석과 더불어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가장 큰 명절이라지요. 예전엔 일본도 음력을 썼으나, 휴일에서 빠지면서 구정이란 관습은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각지에는 음력설 행사나 풍물 등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도 있습니다. 1월에 방문한 규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쵸 난고쿠도 그중 하나입니다.
  본래 난고손이라 불리던 이 고장에 백제 전설의 증거로 일컫는 ‘시와스 마쓰리(師走祭り)’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진가 오가와 유지(小川裕司) 씨 등 몇 분과 함께 주말을 이용해 다녀왔습니다. ‘시와스(師走)’란, 점잖은 스승(師)마저 종종걸음을 칠 만큼 바쁜 달이란 뜻으로서 음력 12월 곧 섣달을 이릅니다.

  서기 660년, 백제는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 때 일본의 사이메이 덴노는 백제의 요청을 받고 황태자 나카노오오에노 오지(中大兄皇子)와 함께 대규모 원군을 파견하나 기다리던 나당 연합군에게 대패해 백제 중흥의 꿈은 깨지고 맙니다. 여기까진 나도 일본사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또 숱한 백제 사람들이 일본에 망명한 것도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때 일본에 망명한 백제 왕족들이 미야자키의 깊은 산 속에서 안주의 땅을 찾았으되 이루지 못한’ 이야기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난고손 시절 발행한 《백제전설·미카도 이야기》에 따르면, 백제에서 망명한 왕족 일행은 처음 오우미노쿠니에 자리 잡았으나 얼마 후 무슨 사정인지 그곳에서 쫓겨나 2척의 배로 지금의 기타큐슈(北九州)인 쓰쿠시(筑紫)로 향합니다. 당시는 일본 고대사상(古代史上) 최대의 동란인 ‘진신노란(672년)’을 비롯해 많은 사변들이 빈발했던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진신노란’ 자체를 백제계와 신라계 귀화인의 싸움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백제 왕족 또한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을지도 모르지요.   여하튼 쓰쿠시를 향해 떠난 2척의 배는 하필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부왕 데이카오(禎嘉王)와 차남 가치오(華智王), 그리고 측근들은 휴가(日向)의 가네가하마(金ヶ浜)에, 후쿠치오(福智王)와 그의 비(妃), 데이카오의 비 등 일행은 가구치우라(蚊口浦)에 각각 도착합니다. 길이 엇갈린 이들은 각기 점괘에 따라 깊은 산중의 미카도(神門)와 히키(比木) 땅에 가까스로 당도, 얼마간은 안도의 나날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데이카오의 생존 소식을 들은 적군은 어느 날 추격대를 보내고, 이를 맞아 싸우던 데이카오와 부왕을 도우러 달려온 후쿠치오를 위시한 많은 백제인들은 장렬히 전사합니다. 이리하여 부왕의 영령은 미카도 진자(神門神社)에, 아들 후쿠치오의 영령은 히키 진자(比木神社)에 따로 모시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상은 미야자키현 일대에 내려오는 ‘백제 전설’로, 이제 와서 그 진위를 가릴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네가하마와 가구치우라에서 히키, 미카도 일대에 걸친 지역에는 지금도 백제와 얽힌 지명 등이 많습니다. 그뿐 아니라 미사토쵸 난고쿠의 미카도 인근에서는 나라 쇼소인(奈良 正倉院)의 소장품과 흡사한 백제에서 전래된 동경(銅鏡) 같은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고 있어 이 전설이 단순한 설화가 아님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미사토쵸와 부여(扶餘)도 자매도시 결연을 맺은 사이로, 내가 가 있는 동안에도 부여군의회 의장 일행이 김현명 후쿠오카(福岡) 총영사와 함께 이곳을 찾아왔었습니다.   난고손을 처음 찾은 나는 산골마을에 내려오는 ‘시와스 마쓰리’가, 백제 전설에 따라 1년에 한 차례 히키 진자의 후쿠치오 신령이 미카도 진자에 모셔진 부왕 데이카오의 신령을 만나러 가는 형태를 취한 엄숙한 종교의식 신지(神事)에 이 고장 사람들의 액막이와 풍작, 순산 등의 기원을 곁들인 대규모 제례임을 알았습니다. 히키와 미카도는 거리상 90㎞나 떨어져 있어 쇼와(昭和) 초기까지는 9박 10일을 요하는 굉장한 행사였으나, 현재는 자동차를 이용한 2박 3일의 일정으로 간소화되었다고 합니다. 하여간에 이처럼 멀리 떨어진 두 지역민들을 이어주고, 빠져들게 하는 행사가 1300여년이나 면면히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낭만적입니다.


  둘째 날인 ‘나카노히(中の日)’의 밤, 신에게 제사 지낼 때 바치는 무악(舞樂)인 가구라를 볼 때입니다. 한 손에 소주잔을 들고 춤에 맞춰 즉석에서 구성진 가락으로 노래하는 중년의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낭랑한 음성에 18절까지 이어지는 가구라 춤을 훤히 꿰고 있는 듯하여 “이 마쓰리가 왜 이렇게 오래 지속되고 있다고 보시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거야 뭣보다도 (따로 떨어져 사는 부자를 해마다 만나게 해줬을 정도로) 이곳 사람들이 착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백제 사람들이 의학, 농학 등 과학 분야를 비롯한 선진 지식을 가져와 고장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까닭도 있고요.” 딱 부러지면서도 참 알기 쉬운 설명이었습니다.
  마쓰리의 클라이맥스는 사흘째인 ‘사가리마시(下りまし)’의 고별 의식. 신전에 바쳤던 도미를 구워 그것을 안주 삼아 술잔을 나눈 후, 돌아가야 하는 히키의 일행도 이를 배웅할 미카도의 일행도 헤어지는 슬픔을 눈치 채일까 봐 얼굴을 검게 칠하는 ‘헤구로(へぐろ)’라는 의식을 갖습니다. 그런 다음, 귀로에 오르는 히키 일행과 나란히 서서 이를 배웅하는 미카도 일행. 특히 후자에는 우지코(氏子 : 같은 씨족신을 모시는 고장의 사람)들이 취사 도구류를 들고 배웅하는 대열에 가담해 저마다 “오사라바(おさらば)”, “오사라바”를 외치며 작별 인사를 합니다. 여기서 우지코는 후쿠치오가 출발한다는 소리에 급히 달려온 민중을 상징하며, ‘오사라바’는 ‘사요나라(さようなら)’ 곧 ‘안녕히!’란 뜻입니다. 1년 만에 재회해 이틀간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고는 하나, 부자(父子)에게 헤어짐은 역시 괴로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더군요. 그런 여러 가지 상념들을 ‘오사라바’에 실어 손을 흔들다 보니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마쓰리 사진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마쓰리가 정말로 1300년 이상 계속되어 왔다면, 가령 가구라 춤사위속에 백제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맨 처음 마쓰리를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백제에서 귀화한 사람도 들어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한국에도 ‘시와스 마쓰리’의 뿌리가 남아 있는 게 아닐까. 부자는 1년에 한 번의 재회만으로도 기쁠지 모르지만, 행여나 백제 땅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진 않을까. 미야자키에 다녀온 후로 아무래도 난 ‘백제 사랑’에 빠졌나 봅니다.


시와스 마쓰리행사 _ 음력 12월 19일에 가까운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사흘간 거행된다.
○ 첫날은 ‘노보리마시(のぼりまし)’라고 하여, 후쿠치오의 ‘고신타이(신령의 상징으로 예배의 대상이 되는 물체)’가 히키를 떠나 미카도로 올라가는 일련의 행사. 그중에서도 저녁나절 혼백을 맞이하기 위해 불을 놓는 ‘무카에비(迎え火)’가 장관으로 아주 유명하다.
○ 둘째 날 ‘나카노히(中の日)’에는, 부자의 재회를 축하하는 다양한 제례의식 신지(神事)와 함께 이 고장에 대대로 전승되어 온 가구라 춤을 춘다.
○ 사흘째 ‘사가리마시(下りまし)’에는, 히키로 돌아가는 후쿠치오(福智王)를 위한 ‘오와카레시키(お別れ式)’로 시작해 미카도 주민들이 논길에 서서 배 웅하는 ‘오와카레노교지(お別れの行事)’ 등 갖가지 고별 의식이 거행된다.


사진설명

다마구시 호노(玉串奉納) _ 일 때문에 미사토쵸 난고쿠에 도착한 것은 둘째 날 점심 때. 첫날 ‘노보리마시’의 ‘무카에비’도, ‘나카노히’ 오전의 ‘오키누카에(おきぬ替え)’도 놓치고 말았다. 이는 미카도, 히키 진자에 모신 두 ‘고신타이’의 옷을 1년에 한 번 새로 갈아입히는 의식인데, 실은 일본종이 와시(和紙)로 겹겹이 쌓여 있다. 한편 ‘나카노히’ 오후 첫 행사(두 진자의 구지(宮司), 우지코들이 부자의 재회를 공식적으로 경하 드리는 의식)에는 나도 내빈의 하나로 신전에 다마구시(비쭈기나무 가지에 천이나 종이를 늘어뜨린 것)를 바치는 영예를 안았다.(사진1-3)
미카도와 히키 진자의 구지(宮司)와 함께 _ ‘나카노히’의 저녁나절, ‘고신타이’를 모시고 가까운 강가로 간다. 강변에서 주운 크고 작은 돌 2개를 ‘오키누카에’ 때 나온 헌 종이로 싸서 왼쪽 어깨에 얹고 잠시 걷는다. 이튿날의 출발을 앞두고 옷을 빠는 의식이다. ‘시와스 마쓰리’의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사진 5)
요카구라 _ 좀 작지만, 춤추는 사람이 쥔 막대 끝이 가리키는 것이 본문에 나오는 ‘아주머니’다.(사진 4)
오헤구로 _ 나도 얼굴을 검게 칠했다.(사진 6)
오사라바(おさらば) _ 짧은 일정이었지만 히키 사람도 미카도 사람들도 참 친절했고, 백제 전설도 흥미로웠다. “오사라바”, “오사라바”를 외치는 사이에 정말로 이별의 아쉬움이 밀려왔다.(사진 7)

(사진 제공 : 오가와 유지 / 번역 : 김경희 번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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